-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2021)>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관람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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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하
등록일 2021.05.09
조회 31356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그렇듯이, 나에게도 인생 연극으로 남을 듯하다. 국립극단 측에서 "동양의 햄릿"이라며 캐치프레이즈를 하기에, 관람 전부터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은 시샘하는 마음마저 들었다. 무슨 연극이 얼마나 대단하길래 햄릿까지 들먹이는 것일까. 재미없기만 해봐라. 그리고 나는 연극을 다 본 뒤, 이런 나의 삐뚠 태도를 반성할 수밖에 없었다. "동양의 햄릿"이란 수식어는 이 작품에 어울리지 않다.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는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자체로 인정받아 마땅하다. 진나라의 장수 도안고는 권력에 눈이 멀어 충신 조순의 일가를 멸족하기에 이른다. 조씨 집안의 문객이었던 시골의사 정영은 얼떨결에 억울하게 멸족당한 조씨 가문의 마지막 핏줄인 조씨고아를 맡게 되고, 온갖 희생을 감수하며 그를 굽어 살피는데... 권력 다툼, 억울한 죽음, 복수의 사명. 여기까진 햄릿과 비슷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에는 햄릿에는 없는 소중한 가치가 깃들어 있다. 첫째, 비극 속의 희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의 스토리만 보면 참말 눈물 없이 보기 힘든 비극이다. 그러나 중간중간 웃긴 장면들이 삽입되어 있어 분위기가 너무 가라앉지는 않는다. 이 기막힌 완급 조절이 관객들로 하여금 극에 더욱 몰입할 수 있도록 돕는다. 우리는 단순히 슬픈 장면을 봤다고 해서 눈물을 흘리지는 않는다. 저 슬픈 장면이 우리에게 실존하는 슬픔으로 다가올 때야 비로소 눈물 한 줄기를 떨구는 것이다.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그 '강한 한 방'이 무엇인지 매우 잘 이해하고 있다. 둘째, 배우들의 열연으로 구현한 동양만의 미학. 빈틈없이 무대를 채웠던 배우들의 움직임과 노랫말이 아직도 눈앞에 선연하다. 특히 그것들은 서양의 것이 아닌, 우리 동양만의 멋ㅡ곡선의 움직임, 아름다운 봄을 묘사한 서정적인 가사ㅡ이 서린 것이라 더욱 마음에 남는다. 2500년 연극사의 중심은 언제나 서양이었다. 그 기울어진 판에 한바탕 펼쳐진 우리의 것!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움직임과 노랫말을 완벽하게 해낸 국립극단 배우들이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셋째, 권선징악의 뻔한 플롯을 배격함. 이 작품의 가장 좋았던 점. 단순히 조씨고아가 복수를 성공하느냐, 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의 복수 하나만을 위해서 정영을 비롯한 수많은 인물들이 치러야 했던 그 막대한 대가는 어찌할 테지? 과연 완벽한 복수가 존재한다는 말인가? 이 묵직한 물음이 극의 마지막 장면을 구성한다. 끝내 희생된 이들과 마주하지 못하는 정영. 그저 펄럭이는 나비처럼 여유롭게 이 세상을 살다 갔으면 됐을 것을. 아니, 그랬으면 좋았을 것을. 벌써부터 또 보고 싶은 연극. 브라보.
(내년에도 재공연 해주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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