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헤다 가블러 > 이혜영의 복귀가 반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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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오*수
등록일 2013.04.17
조회 3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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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제가 배우로서 더 좋아하는 김명곤이 연출한다는것만으로도 혹해서 챙겨 본 연극 [아버지]를 봤던것과 비슷한 동력이 작용돼 이번엔 명동예술극장에서 이혜영 주연의 [헤다 가블러]를 봤습니다. 이 작품을 관람한 이유는 오로지 단 하나, 연극에 출연하는 이혜영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죠. 연극을 예매하고 관람까지 가는데에 아무런 고민이 없었어요. 공연기간 후반에 봤는데 그때까지 나온 평가가 어떻건 공연의 완성도가 어떻건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찾아볼 생각도 안 했죠. 요즘엔 공연이나 영화 관람 전에는 후기나 전문가 평가는 되도록 안 보려고 하거든요. 간단하게 작품과 관련된 인사들의 약력과 기본 정보, 줄거리 정도나 파악하고 보죠. 실질적인 그 작품 자체에 대한 평가를 보고 관람하면 작품 감상에 별로 도움이 안 되더군요.
물론 [헤다 가블러]를 주저없이 선택한데에는 공연을 두루는 부수적인 이유도 여럿 포함돼 있기는 했죠. 거기엔 명동예술극장표 연극이라는 믿음과 신뢰, 고전 희곡에 대한 호감, 정통극에 대한 제 취향을 만족시켜주는 요소가 두루두루 갖춰져 있었기 때문에 관람 여부에 대해 고민할 틈은 없었습니다. 명동예술극장 공연에서 입센 희곡을 이혜영 출연으로 올린다는데 무슨 고민이 더 필요할까요. 이런 작품은 공부하는 마음으로 선택해도 흡족할만한 기본결과를 도출할것입니다. 그 중심에 이혜영 출연이라는 희소성이 자리 매김하고 있었기에 주의 깊게 보고 있었죠.
저에게 이혜영은 영화 배우 이전에 연극 배우로 각인된 배우입니다. 그녀가 출연하는 연극이나 뮤지컬을 직접 본적은 없어요. 그러나 그녀가 방화시절 숱하게 찍은 별볼일 없는 영화보다 간간이 출연한 뮤지컬과 연극에서 훨씬 더 좋은 평가와 배우로서 나은 대접을 받았다는건 알고 있죠. 그래서 언제고 이혜영이 출연하는 무대극을 접하고 싶었어요. 늘상 궁금했어요. 2004년 미니시리즈 [미안하다, 사랑한다]에 출연전까지 이혜영의 t.v드라마 출연은 1989년에서 1990년까지 방영한 kbs시대극 [역사는 흐른다]밖에 없었습니다. 이혜영의 첫 드라마 진출작이었죠. [미안하다, 사랑한다]출연전까지 이혜영의 주목할만한 방송 활동은 sbs개국 당시 [뉴스 쇼]진행을 했던건데 이것도 최근 [무릎팍 도사]나 [승승장구]의 초대 손님으로 출연하면서 대중적으로 알려진거죠. sbs개국 당시엔 얼마 출연 못하고 방송사 개편 때 교체됐으니까요.
둘째를 낳고 얼마 뒤 출연한 [미안하다, 사랑한다]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이혜영의 연기도 재주목을 받았고 그 뒤 주 활동지가 주로 t.v쪽이었기 때문에 요즘은 이혜영 하면 목소리 독특하고 과장된 연기를 선보이지만 카리스마에 있어서는 전매특허를 발휘하는 독특한 느낌의 중견 여배우 쯤으로 인식하고 있는듯해요. 이혜영이란 이름을 말하면 동명이인 패셔니스타 때문에 한번에 알아듣는 사람들도 별로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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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소싯적 과거와 달리 띄엄띄엄 연기 활동에만 주력하는 중견 여배우 이혜영, 여전히 성공작보다 실패작이 더 많은 이혜영이다 보니 종영한지 8년이 지났는데도 이혜영 하면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극성맞은 모성애 연기입니다. 안타깝죠. 이혜영의 작품 보는 안목이 부족한걸수도 있겠지만 배우가 가진 능력치를 끌어내지 못하는 영화계와 방송계를 한탄하게 됩니다. 그나마 방송쪽이 조금 더 나아요. [패션70]이나 [내 마음이 들리니]같은 드라마에선 [미안하다, 사랑한다]만큼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줄 기회가 있었으니까요. [꽃보다 남자]도 완성도를 떠나 굵직한 성공작이었죠.
근데 이혜영은 한창 왕성하게 활동했던 80년대에도 그랬고 95년작 [헤어드레서]를 끝으로 영화계와 멀어졌던 90년대에도 영화계에선 마땅한 대표작은 없던 배우였습니다. 그나마 각인된 작품이 장선우의 [성공시대]였는데 그 영화에서도 연기보단 이미지로 남았던거죠. 여주인공 이름이 무려 성소비였어요. 그냥 이만희 감독의 딸 이혜영, 배우 이혜영으로 자리 잡혀 있었지 특정 작품에서 특정 배역을 연기한 배우로 기억되진 않았어요. 그러기엔 이혜영 자체의 존재감이 너무나도 컸고 에바 가드너 같은 배우를 꿈꿨던 이혜영을 키워줄만한 토양이 부족했죠. 대신 그녀가 마음껏 자신이 하고 싶은 배역과 연기력을 펼치며 인정 받을 수 있었던 곳은 무대였습니다. 원래 무대부터 시작한 배우고 20세기까진 꾸준히 연극과 뮤지컬에 출연했었죠.
실제로 작품질도 연극이나 뮤지컬쪽에서 훨씬 좋았고 수상 실적도 연극 쪽에서 돋보였습니다. 장미희 최고의 연기를 볼 수 있는 [사의 찬미]의 원작이 연극이었는데 연극판 [사의 찬미]에서 주연을 맡은 이혜영은 그 작품으로 동아연극상을 받기도 했으니까요. 이혜영 본인도 이를 잘 알고 있는듯하죠. 이번에 [헤다 가블러]제작발표회 때 자신을 연극배우라고 소개하면서 연극 쪽에서 하고 싶은 배역을 더 많이 맡았고 결과도 좋았기 때문에 연극배우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고 덧붙인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헤어드레서]를 끝으로 실종설까지 나돌며 프랑스로 훌쩍 떠났다가 돌아오기를 반복, 결혼에 출산에 말많고 탈많았던 90년대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이혜영은 꾸준히 무대를 잊지 않았죠. 그 당시 왜 갑자기 영화를 안 찍고 연극에만 매진할까 궁금했었어요. 이혜영이 한참 연극에 집중하고 있던 시절 동시대적으로 기억나는 작품들은 가난한 예술가 흉내에 푹 빠져 있는 유인촌의 모습이 그저 멋지게만 보였던 [문제적 인간 연산]과 악극 [눈물의 여왕], 그리고 [헤다 가블러]에 나오기 전 마지막으로 출연했던 [햄릿1999]입니다. 이 작품도 유인촌 극단에서 만든 작품이었죠. [문제적 인간 연산]은 1995년 당시 굉장한 화제작이었기 때문에 방송에서 자주 소개가 됐고 유인촌의 연기도 화제를 모았습니다. 유인촌이 연산군 역을 맡은건 연극이 처음은 아니었는데 정말 대단했어요. 전 유인촌이 임권택 감독의 [연산일기]에 출연한걸 봤었는데 아직까지도 유인촌 이상의 연산군 연기를 보여준 배우는 없다고 생각해요.
전도연이 [접속]으로 확 뜨고 난 뒤에 조연으로 출연한 [눈물의 여왕]도 그 당시 주목 받는 작품이었습니다. 훗날 전도연이 [접속]촬영하면서 [눈물의 여왕]대본을 암기하느라 고생했다는 일화도 있죠. [눈물의 여왕]같은 경우는 ebs에서 공연 전막을 중계해준적이 있어서 본 기억이 나네요. 이혜영이 갑자기 프랑스로 갔다가 귀국해서 출연한 복귀작이라는데서 화제가 되기도 했고요. 방송을 통해 연극 배우 이혜영에 대한 인상이 선명하게 남아있던지라 과연 언제쯤이면 이혜영의 무대 연기를 볼 수 있을까 기다렸는데 [헤다 가블러]를 통해 오랜만에 적역을 맡아 무대로 돌아온 이혜영의 연기를 볼 수 반가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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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연된지 120년이 지나고 나서야 국내에서 정식 초연을 갖는 연극 [헤다 가블러]에서 타이틀 롤을 맡고 있는 이혜영은 기대한만큼의 호연을 보여주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녀에게 잘 어울리는 작품이었죠. 이혜영은 원래 이런 고전 비극을 선호했습니다. [헤다 가블러]의 여주인공은 이혜영과 잘 어울리기도 했지만 이혜영 자신도 그걸 잘 알고 있었고 즐기고 있습니다. 다만 이런 류의 작품들이 시류에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이혜영이 그런 배역이나 그런 작품과 만날 확률은 희박합니다. [사의 찬미]만 해도 그 작품이 영화로 만들어졌던 1991년도에도 시대착오적인 소재라는 우려를 샀던 작품이었습니다. 그러니 이혜영이 국내에서 활동하는데 얼마나 큰 제약이 있었는지 알만하죠. 이혜영은 이자벨 아자니처럼 시대를 잘못 만난 배우에요.
연극 [헤다 가블러]는 자신이 아니면 안 된다는 확고한 믿음을 받았을 때 주저없이 온 몸을 던져 버리는 이혜영의 열정적인 연기와 배역 해석이 3시간 가까이 되는 긴 상연시간 내내 한번도 흔들림 없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이혜영 특유의 과장된 연기가 연극 무대에선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정제된 연기였어요. 자기도취도 강한데 전혀 거북하거나 식상하지 않아요. [피도 눈물도 없이]이후 지난 10년간 이혜영이 영화, 방송에서 보여준 연기를 통털어서도 근접하지 못할 파괴력과 개성, 인상을 남겼죠.
이혜영에 의해 지탱되는 연극입니다. 모두가 이를 알고 있고 그래서 이혜영은 더욱 더 연기할 맛이 났을거에요. 일단 자유를 갈망하고 욕망에 주체없이 흔들리면서도 정신분열적인 증세를 겪으며 허물어져가는 예민하고 독립적인 여주인공이 등장하는 시대극이라는 설정이 이혜영과 잘 어울리기 때문에 이질감이 없고 그녀의 과장된 연기도 이런 틀 안에선 전혀 튀지 않고 자연스럽게 섞입니다. 그래서 배역에 더욱 더 집중할 수 있게 됐고요.
극은 묘한 분위기로 진행되며 순간순간 기괴한 음향효과를 통해 [헤다 가블러]의 불안정한 심리 상태를 돌출시킵니다. 인물이 분출하는 개성과 자의식이 시대적 억압에 짓눌려 마음껏 펼치지 못하고 그러면서도 그녀가 속한 세계에선 예의없고 거만하지만 결국엔 현실에 순응하면서도 그걸 동시에 부정하며 끝없이 자신의 이중성에 혼란스러워 하는 헤다의 심리 변화에 집중한 이 작품은 헤다의 심정을 결코 노골적으로 드러내진 않습니다. 천천히 한단계 한단계를 조심스럽게 밟아가며 인물 관계도와 복잡한 심리 변화를 확장시키고 있죠. 여기서 관객은 주인공의 모순된 감정을 통해 시대적 억눌림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또한 주체적이면서도 대단히 혼란스럽고 드라마틱한 여성상의 구현이라는 점에서 여자판 [햄릿]이란 찬사를 들을 정도로 유명한 이 작품의 성과를 확인하며 캐릭터에 대한 매력도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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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극의 내용이 이혜영 연기만큼 인상에 남진 않습니다. 일단 너무 길어요. 인터미션을 빼도 150분이이나 되는데 체감시간은 그 서너배는 되는것같습니다. 이야기가 한도끝도 없이 늘어져요. 뭔가 비밀스러운걸 들춰낼것처럼 굴지만 정작 나오는 결과는 뻔히 예상되는 인물관계도에 얽힌 치정극이 되고 말죠. 자유를 갈망하는 여주인공의 복잡한 심리 상태를 보여주기 위해 이 정도로 긴 전주가 필요한가 싶습니다. 중심 내용은 한 줄로 요약할 수 있는데 그걸 보여주기 위한 사족과 부연 설명이 많죠. 그래서 굉장히 지루합니다. 극 초반에야 과연 13년 만에 연극 무대에 복귀한게 맞나 싶을 정도로 무대 연기가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흡수된 이혜영의 노련한 연기와 장악력에 몰입도를 높일 수 있지만 초반의 긴장감이 풀리면 주인공 [헤다 가블러]의 심리 상태 만큼이나 나른하고 권태로운 전개가 도무지 끝이 안 날것처럼 지속됩니다.
정통극을 숙제하듯 풀어간 작품인데 쉽게 풀 수 있는 이야기를 필요 이상으로 꼬아 놨어요. 원작 희곡의 정식 초연 무대라는것에 스스로 발목을 잡은것같기도 하고 120년된 원작 희곡에 대한 예의를 갖고 정석대로 임하다보니 이야기에 대한 흥미를 반감시킨것같습니다. 모범적인 정통극이긴 하지만 극에 대한 흥미요소는 떨어지는 작품이 [헤다 가블러]였죠. 극 초반은 이혜영 연기 외에도 눈에 띄는 요소가 많아 집중이 잘 됩니다. 소품에 신경 쓴 무대 연출과 조명의 사용이 인상적이거든요. 그러나 예쁜 무대를 바라보는 시각적 즐거움과 곧이어 나오는 이혜영의 선명한 연기에 대한 긴장감은 금세 휘발됩니다. 극을 보다보면 대체 지금 저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상황 파악이 안 될 정도로 고요하기만 하고 극 전개를 포기한것처럼 보일 지경이에요.
연극의 주제도 그렇죠. 억압적인 시대 분위기에 적응 못한 여주인공의 자유분방한 사고방식에서 맞딱뜨리게 되는 현실의 굴레와 가치관의 차이, 그로 인한 몰락과 파괴지향적인 행동, 욕망의 들끓음같은건 이미 많은 작품에서 그려낸 구성입니다. 아름답고 인기도 많지만 도도하고 자아가 강하며 결코 행복하지 못한 헛똑똑이 같은 여주인공 캐릭터는 이미 여러 작품에서 자주 접한바 있습니다. 그러니 [헤다 가블러]의 내용을 이제 와서 보면 촌스러운거죠. 아무리 여자판 [햄릿]이라고 추켜세워도 이런 작품은 이제 익숙한것이 됐고 요즘 시대에 공감대를 사기도 어렵습니다.
낡았다는 생각까진 들지 않지만 구태의연한 전개 방식이라는 생각은 들죠. 그걸 이혜영의 안정적인 연기력으로 보안하기는 하지만 총 4막짜리 연극에서 각 막이 전환될 때마다 커튼콜을 기다리게 만들 정도로 지루하게 이어지니 이 작품이 해결해야 할 부분은 원작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적절한 편집과 재해석이에요. 이혜영의 연기는 훌륭합니다. 사실 신혼여행에서 갓 돌아온 여주인공의 나잇대를 고려하면 50대 이혜영이 맡을 만한 배역은 아니었어요. 그러나 오페라 가수의 연기를 볼 때처럼 이혜영의 연기는 나이를 초월하는게 있습니다. 13년간 연극 무대를 떠나 있었던 배우에게서 느껴질법도 한 무대와의 괴리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테크닉적으로 훌륭한 연기였습니다. 이렇게 감이 좋은 배우의 연기를 보고 있자면 타고났다고밖에는 설명이 안돼요. 그러나 전반적으로 연극 [헤다 가블러]는 문학책의 재미없이 동어반복으로 가득찬 길디 긴 문학 박사의 해설서를 읽는 기분이었습니다.
- 대학생 단체 관객이 수십명 들어와서 관람 분위기를 저해시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극이 시작하니까 다들 조용히 관람하거나 숙면을 취하더군요. 배우 겸업의 교수가 출연하는 연극이었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