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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을린 사랑> 진실과 마주할 용기가 있는가.
  • 작성자 최*경

    등록일 2012.06.27

    조회 2128

     
 

진실과 마주할 용기가 있는가.

 
     

 

때로 진실은 아픔을 내포한다.

비록 그것이 어쩔 수 없는 불가함에 기초할 지라도, 혹은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짓눌렸다 할지라도 말이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살을 섞고 동생들의 아비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오이디푸스 또한 진실을 마주하고서 더욱 절망했었다. 이오카스테의 죽음과 자신의 실명과 죽음에 이르는 생(生) 동안 방랑할 수밖에 없는 외로움으로 내몰린다.

 

가끔 나는 생각한다.  

과연, 진실을 마주하는 것만이 길이었을까. 꼭 진실을 알아야만 했을까.

그것이 파멸로 혹은 상처로 온다면 때로는 덮어두어도 되지 않았을까.

 

신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 진실'은 인간에게 복수가 되었음이다.

 

 

<그을린 사랑>은 소재 측면에서야 보면 오늘날에 마주한 "오이디푸스" 이야기의 변주일 수도 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잃어버린 자식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나는 어린 여자아이. 글을 배우고 세상을 배우다 전쟁에 끼어들게 되고 피의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리는 여자. 고문으로 피폐해지고 강간으로 쌍둥이를 낳게되는, 감옥 속의 노래하는 여자, 그리고 어느 날, 침묵하게 되는 나왈이라는 여자의 삶을 따라가며 결국은 오이디푸스처럼 자식의 자식을 낳게 되는 비극으로 마감한다.

 

그러나, 이면을 파고들면 (직접적으로 등장하지야 않지만 저자의 고향이었다는) 레바논의 실상, 이슬람과 기독교의 충돌에 의한 전쟁의 양상, 부족간 대립, 이념의 충돌... 이런 것들로 인해 누가 누구를 죽이고 미워하는지 모르게 긴 세월동안 더께 쌓인 증오 때문에 망가지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부족이 뭐라고. 사랑을 반대하고,

성별이 뭐라고. 교육을 차별하고,

전쟁이 뭐라고. 상대를 죽인다.

 

극 중 대사에 이런 게 있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A가 B를 죽였다. 이유는 B가 A의 여자를 강간했기 때문이다. 왜 B가 A의 여자를 강간했느냐? 이건 또 A가 B의 집을 부쉈기 때문이다. A가 B의 집을 부순 이유는 B가 A의 우물을 파괴했기 때문이다. B는 또 왜 A의 우물을 파괴했느냐. 그건 또... 어쩌고 저쩌고..."

 

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파괴와 증오의 악순환. 도대체 누가 시작했는지 그 시원도 알수 없으면서 정작 오늘의 그들은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들이다. 복수를 하지 않는다면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없는 것처럼, 그들의 존재가 마치 복수를 위해 태어난것 마냥 그렇게 끊임없이 서로에게 총질들이다.

전쟁의 참혹함.

애초부터 서로를 물고 뜯고 싸우지만 않았다면... 와합과 나왈은 서로 사랑할 수 있었을 텐데.

아니, 처음부터 둘은 만날 일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전쟁이 아니었다면 와합은 피난민이 아니었을 테니까.

 

그리고 나왈 역시 레바논에서, 그것도 여자로 태어나지만 않았다면 그런 운명을 빗겨갈수도 있었을 것이다. 죄라면 거기서 그렇게 태어난 것 뿐인데, 태어남조차 선택될 수 없는 모든 인간의 삶에서 누구는 이렇게 살고 또 다른 이는 저렇게 사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으로 가름될수 있는 것인지... 가끔은 신이 있어, 그의 손에 의해 우리의 삶을 이렇게 살도록 선택되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품어보게도 한다.

 

 

참혹한 전쟁의 비극과 더불어 태어남이 원죄였던 쌍둥이가 침묵하는 엄마의 과거를 알아가면서 서서히 드러나는 비극.

진실을 알았을 때, 잔느와 시몬 두 쌍둥이는 자신들에게 따뜻한 미소 한번 보여주지 않던 엄마의 마음을, 이유를, 과거를 알아서 마음이 홀가분해졌을까?

아니면 몰랐던 아버지와 형의 존재를 알아서 마음이 후련할까?

천만에!!!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이고,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은 것도 있는 법이다.

오이디푸스가 테레시아스와 이오카스테의 만류에도 끝까지 진실을 파헤치고 절망했던 것처럼.

(자식을 위한 진실이, 혹시... 나왈의, 삶과 세상-부모, 고향, 폭력...-에 대한 복수는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진실은 존재하기 때문에 '진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진실이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삶을 짓누를지라도 마주하는 진실에서 과거를 만나고 어제를 알아야만이 오늘의 내가 존재함을, 내일의 내가 어떻게 해야 함을 결정할 수도 있는 것이다. 서있는 곳의 의미를 모르고 흔들리는 부표처럼 불안한 존재의 의미를 가지고 앞으로를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어차피 진실을 마주하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둘의 몫이다.

어쩌면 그 둘은 할머니와 어머니, 형이 세대와는 또 다른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 전쟁의 참상 속에 태어났지만 전쟁과는 멀리 떨어져 살아온 오늘의 세대는 과거와는 다르게 살아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게 되는 것이다.

 

 

가슴 먹먹한 비극, 차마 소리내 울지도 못하는 절망의 끝을 보여주는 이 작품이 그래도 가느다란 희망을 품게 되는 것은, 작품 전반에 흐르는 따뜻한 기운 때문일지도 모른다. 참혹한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할머니와 나왈의 대화에서, 나왈과 사우디가 보여주는 우정에서, 나왈이 가지는 희망과 내일에서... 가끔씩 엿보게 되던 따뜻함의 기운. 대놓고 말하지 않는데도 은연중에, 조명속에서, 음악만이 흐르는 조용한 가운데 느껴지던 따뜻함. 그것으로 인해 마냥 이 작품을 절망으로만 내몰지 않음이다.

 

(김동연 연출은 어떨 때 보면 정말 말로 다할 수 없는 따뜻함으로 작품으로 바라보다가도 너무나 시니컬하게 말하기도 하고, 쌩뚱맞게 지루하고 답답하게 만들기도 하는...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연출이 되어간다.) 

 

무대는 전쟁의 폐허처럼 건물 잔해들이 나뒹군다. 그곳은 현재의 나왈의 장례식장이 되기도 하고 몇십년전에 죽은 나지라의 무덤이 되기도 한다. 어느 곳은 강의실 수업중이 되었다가도 어느 순간 테러에 불타는 버스로 변모하기도 한다. 공간 구석구석을 나누고 빈곳 없이 활용하여 명동의 무대를 꽉 차게 만든다. 

 

어린 나왈일 때의 부조화와 불안함을 제외한다면 작품 속 배우들은 모두 안정적이다. 오랜만에 보는 이진희씨, 김주완씨도 반갑고, 어디서 봤다 싶더니 다른 작품(하얀 앵두와 백년, 바람의동료들)에서 본 배우들이였다. 그리고 늘 한결같이 꽃다우신 미중년 남명렬씨, 기대하지 않았으나 뜻박의 수확이었던 배해선씨의 열연과 늙은 나왈로 분한 이연규씨의 깊은 연기는 표현할 길 없는 감동이 있더라.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미처 대비하지 못한 공격에 널부러지듯, 처음 봤을 땐 넉다운 지경이었다. 뒷골 당기는 충격에, 표현할 길 없는 절망에 넋놓고 쳐울다가 배우들의 인사에 제대로 박수도 못치는 코메디를 연출했다. 말그대로 엉엉 울었다. 맨 앞줄에서;

집에 오는데 차마 몰골이... 형언할 길이 없두만. ㅠㅠ

그리고 그 다음날, 다른 초대를 내팽개치고 또 달려간 명동. 어제 봤으니까, 오늘은 덜하겠지... 이미 알고 있으니 어제만큼 놀라지야 않겠지... 라는 기대는 맞았는데, 먹먹하고 가슴 아픈건 여전하더라.

엔간해선 연이틀 달아서 공연, 특히 연극은 보는 일 없건만, 이 공연은 그걸 불사하게 하더군.

놓쳤으면 후회했을 작품. 보고 지나감이 행운이다.

 

역시, 이 맛에 연극 보는 게지! ^^ 

20120423_poster_메인포스터_outline.jpg
그을린 사랑

- 2012.06.05 ~ 2012.07.01

- 평일 19시30분 ㅣ 주말,공휴일 15시ㅣ 월 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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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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