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을린 사랑> 진실을 알면 감당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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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선
등록일 2012.06.26
조회 2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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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의 연극
레바논 출신의 캐나다 작가 겸 연출가 '아즈디 무아와드'의 국내 초연 연극 '그을린 사랑'은 희곡으로 쓰여졌지만 2011년 '드니 뵐뇌브 감독'의 영화로 먼저 소개되었다. 예술영화 사상 가장 많은 관객 동원을 했다던가...주변에서 이 영화에 환호했던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었고, 언젠가는 꼭 보리라 생각했던 영화였는데 이렇게 연극으로 먼저 관람하게 되었다.
원 소스 멀티 유즈 (one source multi-use)인 작품의 경우, 맨 처음 접한 장르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상당히 중요하다. 그것은 매우 깊게 뇌리에 각인되어 다음 장르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따라서 제일 먼저 책으로 읽는 것이 좋은가, 연극으로 보는 것이 좋은가, 영화로 보는 것이 좋은가는 항상 고민이 되는 문제다. 나의 경우, 눈 앞에 장면이 사실적으로 표현되는 장르를 먼저 관람하면 상상력을 요하는 장르에서 상상력은 이전의 이미지로 제한되어 나타나므로 책-연극-영화의 수순으로 관람하는 법을 택한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로 유명한 <아마데우스>와 <그을린 사랑>이 연극보다 훌륭하다고 평을 하는 데에는 이런 영향이 크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영화를 관람하지 않았으나 영화에서는 아랍국가 특유의 이국적이면서도 장엄함 풍광과, 레바논 내전의 참담함, 그리고 현대의 프랑스를 적절히 화면에 녹여냈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것은 마치 기술력이 받쳐주는 <쥬라기 공원> 같은 SF영화와, 기술을 상상에 맡기는 (?) <티라노의 발톱> 같은 SF영화의 차이라고 생각했다. 과연 얼마나 관객들에게 이 연극이 감동을 이끌어 낼 수 있을까...
그러나 무대는..
극장에 들어서자 마자 깜짝 놀랐다. 명동예술극장의 무대 디자인은 언제나 대만족이었지만 오늘의 이 연극만큼 감동을 주었던 무대는 없었다. 거대한 콘크리트의 잔재가 무대 위에 널려있고, 무대 뒤쪽에는 기울어진 피아노가, 무대 앞쪽에는 고급스런 느낌의 책상이 놓여 있다. 피아노가 있는 곳은 나왈과 와합이 사랑을 나누었던 숲이, 무대 앞쪽에는 잔느와 시몽이 유서의 내용을 듣는 변호사 사무실이 된다.
스토리 라인은 단순하다. 어머니 나왈은 친구이자 변호사에게 유언을 남기고 숨진다. 유언의 내용은 쌍둥이가 몰랐던 생부와 형제 (잔느의 오빠, 시몽의 형)을 찾아 자신이 남긴 편지를 전하라는 것이다. 또 편지를 전할 때까지 절대 장례를 치르지 말라고 당부했다. 찾은 후에는 장례를 치르되 기도문 없이 알몸으로 시신의 얼굴을 하늘로 향하게 하지 말고 땅을 보게 하라는 이상한 조건까지 달았다.
남매는 수 년간 침묵을 지키며 살았던 어머니의 유언을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결국 유언을 지키기 위해 살아 있을지 모르는 생부와 남자 형제를 찾으러 어머니의 고향을 찾는다.
잔느가 처음 이 이상한 유언의 내용이 궁금해진 수학 이론이 있다.
그래프 이론
이라는 것으로 점으로 표시된 것들의 결합 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잔느는 이 이론이 가족관계 같다고 말한다. 가령 O는 잔느 자신, D는 쌍둥이 동생이 시몽, B는 자신들을 낳아준 어머니 나왈이라고 하자. 이 도형에서 O인 잔느는 D인 시몽과 B인 어머니 나왈, 혹은 할머니인 A만 보인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C인 아버지와 E인 다른 가족들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잔느는 C와 E가 궁금해진다. 어째서 그들은 보이지 않았을까..
대학교수인 잔느가 이 이론을 설명하자 그래프는 정면의 커다란 콘크리트에 영사되고 완벽히 대학 강의실로 바뀐다. 영사물로 대체되는 장면을 한 두 번 본 것이 아닌데 폐허가 된 도시의 잔해 위로 던져지는 이 그래프 이론은 잔느의 의문과 답이 한 공간 안에 보여지는 깊고도 장엄한 울림을 준다. 그런 것을 발견할 때마다 팔에 소름이 돋았다. 이 장면 자체가, 아니 연극 자체가 그래프 이론이었다. 답을 말하지 않았다고 해서 답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영화에서는 만날 수 없었던 장면이지 않았을까?
'반전'아닌 '진실을 찾아가는 여정'
어린 시절 중동의 한 국가에서 태어난 나왈은 숲 속에서 또래의 와합을 만나게 되고 아이를 갖게 된다. 고작 14세의 나이에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를 가졌다는 것은 가족들로 하여금 합법적으로 죽임을 당할 수 있는 것이었으므로 (이슬람 국가및 인도의 몇몇 주에서는 "명예살인"이라는 명목으로 가족 구성원이나 친척이 가족이나 공동체에 수치와 불명예를 가져온 사람을 죽일 수 있다.) 나왈의 어머니와 할머니는 아이를 태어나자마자 다른 마을에 버린다. 힘이 없는 나왈은 떠나 보내는 아이의 귀에 대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난 널 언제나 사랑할 거야.’라는 말 밖에는 속삭일 수가 없다.
여자도 배워야 한다는 할머니는 유언으로 나왈은 자신이 자라온 마을을 떠나 세상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는 돌아와서 할머니의 비석에 할머니의 이름을 새긴다. 할머니의 무덤은 이 마을에 이름이 새겨진 비석이 있는 유일한 여자의 무덤이 된다. 나왈이 모래 위에 글씨를 쓰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다. 그녀는 바닥에 글씨를 쓰지만 관객들은 역시 정면의 영상으로 아랍어로 쓰여진 할머니의 이름을 볼 수 있다.
세상 어디에선가 글을 배워 돌아온 나왈을 흠모하던 사우다는 나왈과 함께 아이를 찾는 여정에 동참한다. 하지만 이 길은 전쟁과 난민으로 얼룩진 길이었고 두 여자는 민병대의 우두머리를 살해하고 크파르 라야트 감옥에 투옥되는 운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여정을 함께했던 사우다는 죽고 나왈은 투옥, 고문, 성폭행 등의 끔찍한 일들을 겪게된다. 이 과정 속에서 나왈을 지켜주었던 것은 사우다의 별명이었던 ‘노래하는 여자’. 감옥 한 구석에서 밖을 바라보며 나왈은 힘들 때마다 노래를 부르겠다는 사우다와의 약속과 언제나 사랑할 것이라는 아이에 대한 약속을 지켜간다.
잔느는 어머니의 여정을 따라 크파르 라야트 감옥에 이른다. 그리고 어머니 나왈이 감옥에서 상습적으로 강간을 당하고 쌍둥이를 잉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크파르 라야트의 악명 높은 고문기술자 니하드가 바로 어머니가 14세에 낳은 아들이었다는 사실은 잔느로 하여금, 그리고 관객들로 하여금 어째서 나왈이 침묵하게 되었는가를 이해하게 한다.
반면 어머니가 남긴 노트를 통해 형의 존재를 추적하다 진실을 알게 된 시몽은 잔느에게 1+1=1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한다. 그들이 찾고 있던 사람은 형+아버지 였으나 두 사람이어야 할 이들은 아버지이자 형인 니하드였다. 잔느는 역시 수학으로 동생의 의문에 답한다.
1+1=1이 될 수도 있다는 수학 공식인
콜라츠의 추측
은 임의의 자연수를 짝수이면 2로 나누고 홀수이면 3을 곱하고 1을 더하는 것을 계속 반복하면 1이 된다는 것으로, 예를 들어 17을 생각해 보면 17 -> 52 -> 13 -> 40 -> 20 -> 10 -> 5 -> 16 -> 8 -> 4 -> 2 -> 1... 이 된다는 것이다. 연극에서는 폐허의 콘크리트에 숫자가 우박처럼 떨어진다. 숫자가 우박처럼 구름 속에서 커지고 작아지는 것을 반복하다가 지상으로 떨어지는 것과 비슷하다고 해서
우박수
라고도 불리는데 실제로 극 중에서 숫자가 커졌다 작아졌다가를 반복하며 계속 아래로 떨어지고 마지막에 남은 숫자 1이 커다랗게 빛을 발하는 장면은 믿을 수 없는 1+1=1의 진실에 울림을 더했다.
연출인 김동현씨는 ‘반전’ 이 아닌 ‘진실을 찾아가는 여정'에 중심을 두고 연출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 연극은 반전의 내용을 전부 알고 관람해도 놀라운 연극이었다. 아니 오히려 반전의 내용을 알고 관람하면 왜 어째서 이 인물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에 대해 더 숙고하면서 관람할 수 있도록 했고, 모르고 지나갔을 평범한 대사 속에 엄청난 양의 진실과 철학적 명제가 들어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마지막에 잔느와 시몽이 '어머니의 침묵의 소리를 들어보자'며 이어폰을 한 쪽씩 나눠 끼는 장면에서는 그 동안 너무 아프고 먹먹하여 흘릴 수 없었던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이 연극은 그런 연극이었다.
진실을 알면 감당할 수 있겠는가..
치유의 숲, 할머니의 비석, 그래프 이론, 사우다의 노래, 우박수...너무 많은 의미가 한꺼번에 쳐들어와 한동안 감당할 수 없었던 연극이었다.
주인공 나왈을 3명의 여배우가 나이대별로 나눠 맡는 부분은 연극만이 가진 매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14세의 나왈이 어머니와 할머니가 함께한 초반 장면에서 함께 등장한다. 그런데, 할머니의 유언에 따라 세상에 나갔다 돌아와서는 어머니의 모습을 하고 있고, 감옥에서 출감하고 법정에서 증언을 할 때는 할머니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은 나왈이라는 여인의 이야기지만 어느 여인의 이야기도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하고, 연령대에 맞는 캐릭터를 부여하여 각 장면마다 깊은 공감을 이끌어 낸다. 하지만 이 배우들간의 격차가 심해서 14세의 나왈이 등장하는 초반 무렵은 극 전체에서 가장 완성도가 떨어지고 나왈과 와합의 사랑을 이해하기 어려웠으며 잔느와 시몽 역시 연기가 몹시 평면적이라 심심하게 느껴졌다.
사우다와 성인이 된 나왈의 연기가 중심을 잡아주고, 일인 다역을 소화해 낸 남명렬씨와 (나이가 들수록 이렇게 멋져 보이는 배우가 있다니 참 좋다. 대한민국의 숀 코너리...
잔느에게 답을 주는 민병대장 역의 제복을 입은 모습에는 그저 눈에 하트가 뿅뿅뿅 날릴 뿐이고..
) 중년의 나왈을 맡은 이연규씨의 열연에는 숨이 막힐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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