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헤다 가블러 > 재능있는 여자의 운명, 헤다 가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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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완
등록일 2012.05.25
조회 2164
'인형의 집'으로 유명한 헨릭 입센의 고전 '헤다 가블러'를
드디어 명동예술극장에서 만났다.
뛰어난 지성과 감성의 소유자이지만,
훌륭한 귀족 아버지 밑에서 따라야 했던 관습과 예절, 명예,
이해하고 소통하지 못하는 고지식한 남편,
여성을 가계를 잇기 위한 수단으로 인식하는 답답한 시대 분위기,
호시탐탐 여성을 성적인 희롱의 대상으로 여기는 주변 사람들 속에서
파멸하는 한 여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갑갑할 정도로 팽팽한 무대위에서
이야기를 끝까지 끌어가는 힘은 배우들의 연기와 앙상블에서 나오는데
그 중에서 압도적인 것은 역시 주연을 맡은 이혜영의 연기였다.
80년대를 20대의 나이로 통과해 온 사람이라면
겨울나그네에서 그녀가 보여 주었던 개성 넘치는 연기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헤다가블러가 한국에서 여지껏 공연이 어려웠던 이유가
주연을 맡을 여배우가 없어서 였다는 언론의 보도가 실감날 정도로
정확한 캐스팅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본인의 나이보다 20여년은 더 어린 역할임에도 불구하고,
나른하고 권태로운 몸짓, 그 속에서 빛나는 광기어린 눈빛,
또랑또랑한 음색은 더없이 헤다 가블러 다왔다고 생각한다.
도대체 무대에서 이 나이(?)에도 이렇게 빛나는 재능있는 여배우가
어떻게 13년 동안이나 무대를 떠나 있었을까?
아주 사소로운 대사 한 마디도 그녀의 입을 통해 흘러 나올때면
관객들을 긴장시키거나 웃게 만들었다.
TV를 통해 보다 많은 시청자들을 만나는 것도 의미있는 활동일 수 있지만,
역시 배우가 가장 배우답게 반짝이는 곳은 무대라는 생각이다.
앞으로 보다 다양한 무대에서 다양한 색깔로
여배우 이혜영을 만나기를 기대한다.
이번 헤다 가블러 무대는 오래 전 보았던 이혜영 주연의 '집'이라는
연극을 오랜만에 떠오르게 했다.
공교롭게도 그 작품의 주제 또한
나른하고 권태로운 중산층의 집의 울타리를 박차고 나서는 한 중년 여인에 관한
이야기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마지막 장면에 그녀가 종이로 만든 새하얀 벽돌로 된 벽을 밀어서 무너뜨리는
장면이 아직도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있다.
그리고 떠오르는 생각 하나,
입센은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인형의 집'에 이어서 어떻게 방황하는 여자의 마음의 결을
이렇게도 섬세하게 그려낼 수 있었을까?
그다지 상업성은 없지만 연극 애호가나 전공자들이 꼭 보고 싶은
이런 고전들을 무대화하는 것은 명동예술극장이 맡아야할 하나의 임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전이라고 해서 늘 지루하고 고리타분한 것이 아니라,
만드는 사람에 따라서 이렇게 산뜻하게 다시 태어날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