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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립극단/명동예술극장 "벌"> [연극] 벌..그들이 오는 의미, 그리고 사라지는 이유
  • 작성자 안*선

    등록일 2011.11.07

    조회 2615

벌

 

을 만나기 전에..

 

배삼식 작가의 작품은 쉽지 않다. 작가가 무척 학구적인 분이라 작품 곳곳에도 다양한 분야의 방대한 지식이 녹아있다. 김동현 연출 역시 마찬가지. 이분의 연출 방식은 무척 조곤하여 갈등이나 클라이맥스 조차도 하품이 나온 적이 많았다. 그런데 그런 두 분이 만나서 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고 했다. 음...관람 전부터 어쩐지 어렵고 힘든 수업을 받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빼먹을 수 있는 수업이 있고, 어렵고 힘든 수업이라고 해도 꼭 강의를 들어야만 하는 중요한 수업이 있다. 어쩌면 나는 극 중의 대사 한 줄 하나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수업에 참석해 보기로 했다. 명동예술극장의 무대 미술은 최고 수준이니 작품에 대한 마음의 각오만 있다면 무대 미술을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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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정보를 검색하기 전에 포스터를 보고는 당연히 이 연극의 내용은 벌(Punishment) 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포스터에는 휠체어를 탄 여자가 있고 그 뒤에 남자가 서 있다. 여자는 어떤 죄를 지어서 휠체어를 타는 벌을 받게 되었을까? 이언 맥큐언의 소설 어톤먼트 가 떠오르기도 했다. 어톤먼트의 브리오니 처럼 여자의 작은 거짓말이 커다란 파국을 맞게 되는 내용일 것이라고. 아니..거짓말을 하는 쪽은 남자인지도 모른다. 나는 약간의 로맨스가 가미된 그런 이야기를 상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건 벌(Bee) 에 관한 내용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포스터 왼쪽 상단에 조그만 벌들이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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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죽어간다는 것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말기 암 환자인 여자가 어느 날 양봉장이 있는 과수원 앞을 지나게 된다. 전염병으로 벌들이 집단 폐사하는 바람에 폐쇄되기 직전의 양봉장이다. 여기에 있는 벌들은 또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라지기도 했다.

 

전 세계적으로 벌들이 다량으로 사라지는 현상이 목격되기도 하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지구의 종말이 다가왔다고도 말한다. 벌은 한낱 작은 곤충이지만, 벌에 의해 우리가 먹는 곡식의70%가 화분 매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인슈타인 박사는'벌들이 사라지면 인류는 오직4년을 버틸 수 있을 뿐이다.'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인류가 먹고 살 수 있도록 해준 벌은 "하늘이 벌을 내리셨다." 라는 표현에 감사함을 얹게 해주고, 이런 벌들이 집단으로 병들어 죽거나 나가서 돌아오지 않으니 이 역시"하늘이 벌을 내리셨다." 라는 표현에 두려움을 가지게 된다. ''이라는 단어의 중의성에 소름이 돋는 순간이다. 관람하는 동안 처음에 생각했던 벌(Punishment) 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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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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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이야기는 벌들의 이야기와 닮아 있다. 어째서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저 누군가의, 혹은 자연의 경이로움의 결과이다. 그런데 어째서 아직 젊은 나이에 ''이라는 병에 걸린 것일까? 왜 하필! 왜 나 인가...무엇을 잘못했기에....여자는 그러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그런데 양봉장 앞을 지나는 순간 사라졌던 수만 마리의 벌떼가 그녀에게 달려들더니 온 몸에 달라 붙는다. 왜 사라졌고 왜 돌아왔는지 알 수 없는 이 신기한 현상으로,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생생하게 살아난다. 그리고 수벌 같은 과수원 주인아들, 젊은 택배기사 김대안에게 마치 여왕벌처럼 열렬히 들이댄다. 김대안은 나이도 많고 암환자에 온몸에 수만 마리의 벌을 붙이고 다니는 그녀가 두렵고(그는 벌 독에 알러지가 있다.) 피하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저항할 수 없는 힘 같은 것을 느끼기도 한다. 3일간의 짧은 순간과 기간 동안에..'

 

자신에게 내린''을 통해 자연과 생명이라는 기적을 경험하게 된 그녀, 온가희는''을 받아 들이고 떠난다. 그녀는 벌에 쏘이면 사람들은 죽을 것처럼 아프고 난리를 치지만 사실 인간은 잠시 아플 뿐이고, 벌은 그 한 방의 공격으로 죽는다고 말했다. "벌은 죽고 사람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라는 말은 온가희가 죽은 다음에 김대안의 입을 통해 다른 울림과 떨림을 전한다. "그녀는 죽고..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담담하게 말하는 김대안이지만 관객들은 알 수 있다. 김대안은 벌침에 더 이상 알러지 반응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것, 외형상으로 그가 변한 것은 없지만 아마도 앞으로 그의 삶은 변화할 것이라는 것을..

 

극 중에 등장하는 간병인, 과학자들, 외국인 노동자 등이 떠나는 마지막 장면에서 어쩐지 <바냐 아저씨>의 마지막이 떠올랐다. 사람들을 모두 보내고 쏘냐는 '우린 결국 쉬게 될 거에요.' 라고 말하면서 평온이 찾아오는 바냐 아저씨의 농장..잠시 뿐이었던 어떤 사건 하나는, 그것을 기억하든 그렇지 않든,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삶에 영향력을 선사한다. 수 백 년 전, 러시아의 바냐 아저씨의 농장이나, 대한민국 경기도의 어느 양봉장이나. 어째서 이러한 모습으로 이런 곳에 태어났는지 아무도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사실일 것이다. 자신에게 벌이 오고 떠난 것처럼 자신의 생명과 소멸을 벌을 통해 받아들이는 온가희와, 김대안을 통해 전해진 그 알 수 없는 우주의 에너지가 수천 년을 지나 보게 되는 호박(琥珀)처럼 내게도 신기하고 신비롭게만 느껴졌다.

 

사라지면 남는 것들..

 

"호박(琥珀)입니다. 꿀벌이 들어 있는 호박입니다. 불가능입니다. 여러분 곁에도 그 불가능이 앉아 있습니다. 다리를 꼬고, 하품을 하고, 이 지루한 이야기가 언제 끝나나 기다리면서. 어쩌면 우리 모두가, 이 세상 모든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존재. 부드럽게 반짝이며 한없이 느리게 흘러내리는, 나무진 같은 시간. 그 흐름 속에서 잠시 버르적거리는, 또 하나의 흐름. 멈춘 것처럼 보이나요? 영원히? 아닙니다. 다만 느리게, 아주 느리게 흐르고 있을 뿐, 우리가 이 앞을 빠르게 지나가고 있을 뿐이지요. "

놀라운 결말이다. 다리를 꼬고, 하품을 하고, 졸다 깨다를 반복하면서 관람하였기에 더욱 그랬다. 작가와 연출은 이 연극이 관객들의 입장에서 상당히 난해하고 지루한 이야기가 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고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예상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는데 난해하고 졸리기는 했으나 결코 지루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졸다 깨어 보면 극중의 인물들은 정말 멋진 말을 하고 아름다운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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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가 당신을 내게 데려왔으니, 그 상처에 입 맞추며 감사하지요."

 

"빠랑게는 벌이 되고 셀파는 눈보라가 된다."

 

 

배우들의 발성이 좋아 대사들은 마치 히말라야 산 위에서 듣는 외침처럼 먼 거리에서도 바로 옆에서 듣는 것처럼 울림과 떨림을 전해 주었다. 또한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아 찾아보니 이은미씨가 안무를 했다. 멋지다. 배우들을 통해 어느 날 저녁, 어깨에 사뿐히 내려앉은 벌처럼 신비롭고 불가사의한 아름다운 움직임을 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벌

 

늘 기대에 벗어나지 않는 무대 역시 최고. 여신동씨의 무대는 지극히 현실적이면서 또 비현실적인 과수원의 모습을 멋지게 표현해 주었다. 깊이 있는 무대의 바닥을 앞쪽은 평평하게, 깊숙한 뒤쪽은 휘게 만들어서 마치 시간과 공간이 뒤틀린 '뫼비우스의 띠'를 연상 시켰고, 마지막 황금빛 호박들이 천정에서 주렁 주렁 내려올 때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내용이 철학적이고 관념적이라 이해하기 쉽지 않았으나 꼭 다시 보고 싶은 작품이다. ''이 왜 오는지, 왜 사라지는지 알 수 없지만 꼭 필요한 존재라고 느끼는 것처럼 이 연극이 그랬다. 다시 봐도 똑같은 장면에서 졸지 모른다. 다시 봐도 역시 이해불가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꼭 다시 보고 싶은...이 시대에 필요한 연극이 아니었을까. 마치 '' 처럼.

20110909_벌_최종1.jpg
국립극단/명동예술극장 "벌"

- 2011.10.13 ~ 2011.10.30

- 화,수,목,금 19:30 | 토,일, 10.19(수) 15:00 | 월 공연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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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학생이상관람가(변동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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