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술하는 습관"> 요즘도 난 연극을 봐. 내겐 연극을 관람하는 예술하는 습관이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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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선
등록일 2011.07.05
조회 3604
예술이란 과연 무엇일까? 예술은 선택된 사람들의 특별한 행위일까? 만일 예술이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이라면 그것은 과연 내게 어떤 영향을 줄까? 나에게 영향을 준 예술은 무엇이 되어 세상 어디로 갈까?
명동예술극장에서 앨런 베넷의 '예술하는 습관(The Habit of Art)'을 관람했다. 지루하고 난해하며 대단히 도식적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의외로 흥미롭게 관람했다. 아니, 실은 그 동안 명동예술극장에서 관람한 명동예술극장 기획 작품들 중에서 <광부화가들>과 함께 손에 꼽을 만큼 재미있었다. 지루하다는 악평을 많이 대하고 관람하여 전혀 기대가 없었기 때문일까?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두 작품 모두 "예술이란 무엇인가?" 라는 화두를 가지고 있다. 몰랐었는데 그 동안에 내가 이런 의문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늦어서 헐레벌떡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가 무대 위의 세트를 보고 숨이 막힐뻔했다. 연극 <예술 하는 습관>은 실존인물이었던 영국의 시인 W. H. 오든과 작곡가 벤자민 브리튼의 가상의 만남을 다룬 연극 '칼리반의 날(Caliban's Day)' 을 공연하는 극중극이다. 관객인 나는 명동예술극장 속의 무대, 그리고 그 무대 속에 자리한 영국의 극단, 그리고 그 극단이 보여주는 ‘칼리반의 날’ 의 무대까지 3중의 무대를 입체적으로 관람하게 된다.
무대 속의 무대에는 2층의 구조로 된 사각형의 책장이 자리했다. 1층은 시인 오든이 기거했던 옥스포드의 브로이 하우스로 지저분하게 널린 책들과 더러운 느낌의 싱크대, 잡동사니가 늘어져있는 책상과 의자, 그리고 굴러다니는 종이들로 꾸며졌다. 책장 위에는 벤자민 브리튼의 연습실로 피아노와 마이크가 설치되어 있다. 이 2층 책장의 건물 좌우로는 배우들이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공간이 있고, 갑자기 등장한 작가가 지켜보는 공간이 있다. 책장 뒤에는 피아노와 음악감독이 위치하여 연극 ‘칼리반의 날’에서 브리튼의 피아노 치는 장면에서 실제 연주를 담당함과 동시에 연극 <예술하는 습관>의 전체적인 음악을 담당한다. 이 모든 무대의 하부, 그러니까 오케스트라 피트 석에는 책상과 음향 장비가 마련되어 있어 조연출과 음향 감독이 자리하여 전체를 조율하고 있었다.
극중극을 다룬 연극들을 자주 보아왔음에도 무척 독특한 느낌을 받게 하는 무대였다. 아마도 그것은 사각형 안의 사각형 무대가 아닌 복층으로 파고드는 분할과 문 속에 문을 두어 입체감을 강조하고, 연극 연습실이라고는 볼 수 없는 위치와 크기의 커다란 창문을 설치하여 극중극의 조명과 배우들이 연습하는 시간의 조명에 시차를 둔 것이 원인이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지금껏 보아온 극중극 장치 중에서 가장 멋진 조명과 무대였다.
배우들의 리허설 장면을 통해 예술가들의 이면을 바라보는 재미가 쏠쏠한 작품이다. 음악가인 벤자민 브리튼과 시인인 오든에 대해 하나도 아는 것이 없었는데도 그러했다. 아니 음악이나 시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는데도 그러했다. 신기한 일이다. 위대한 예술가들 역시 평범한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고민들을 하고 산다는 것을 이 연극이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누구나 게을러지고, 병약해지고, 심약해진다. 중요한 것을 자주 잊고, 세심한 것을 오래 기억한다. 물론 누구나 싱크대에 오줌을 싸는 것은 아니겠지만.
극중 연극의 제목은 <칼리반의 날>이다. 칼리반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템페스트'에 나오는 괴물의 이름으로 섬을 점령한 프로스페로에 대항해 반란을 계획하지만 실패하고 노예가 된다. 섬에 살고 있던 칼리반과 요정은 식민지 지배를 받은 원주민으로, 프로스페로는 정복자로 비유되고는 하는데 어째서 프로스페로가 아닌 칼리반이 이 연극의 주인공이며 제목일까?
오든, 브리튼, 피터, 피츠, 헨리. 작가, 무대 감독...극중의 모든 인물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프로스페로이지만 작품 '칼리반의 날'에서는 칼리반으로 밀려난다. 위대한 시인이지만 시를 쓰는 것은 그저 습관에 불과하게 되었고, 유명한 음악가이지만 이젠 새로운 음악에 밀려나는 기분이 들며, 주인공만 하는 배우이지만 대사가 잘 외워지지 않고, 연습한대로 완벽하게 해내지만 무난한 연기였다는 평을 들으며, 작가인데도 대본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수정되고, 연출이 없는 무대의 감독이지만 통제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섬의 주인이었으나 노예로 밀려난 칼리반이 자신의 입지를 되찾기 위해 싸우는 것처럼 무대 위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싸우고, 조율하고, 연극이 흘러가도록 서로 협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하게 느껴지는 연극이었다. 비록 개개인의 반란은 실패로 돌아가지만 섬에는 평화가 찾아오는 것인가...
마지막에 마치 폭풍이라도 지나간 듯 사람들이 빠져나간 연습실의 무대 위에서 무대감독인 케이가 연극의 매력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감동적이다. 연극은 재미있고, 지루하고, 연극은 복잡하고, 단순하고, 연극은 현실 같고, 환상 같고...제대로 기억할 수 없어서 안타까운 대사이다. 극중에서 오든의 역을 맡은 주연 전문배우 피터의 마음이 아마도 이랬을 듯...책갈피에 대사 쪽지라도 끼워 넣듯 앞으로 나도 연극을 관람할 때 메모지를 지참해야 하나..
연극은 연극이다.
연극은 인간 세상에 일어날 수 있는 어떤 일이라도 무대 위에서 보여줄 수 있다. 정말 멋지지 않은가! 재미있거나 지루하거나, 복잡하거나 단순하거나 연극이 계속 상연되기를 바란다. '난 요즘도 연극을 봐. 나에겐 연극을 관람하는 예술 하는 습관이 있거든..'이라고 언제든 말하고 싶으니까.
무대를 보고 <유르겐 텔러> 사진전에서 본 주디 블레임의 방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지저분하고 너저분한 것도 그렇고 이중의 가면을 쓴 것도, 동성애자라는 점까지 <예술 하는 습관>에서 보여지는 오든의 모습과 주디 블레임의 모습은 신기하리만치 닮았다.
전시회인 <유르겐 텔러 사진전>과 연극 <예술 하는 습관>이 바터로 홍보나 마케팅을 같이 진행했어도 좋았을 텐데 아쉽다. 관객들로 하여금 한 장르에서 다른 장르로 자연스럽게 관심을 유도하는 좋은 장치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연극 <예술하는 습관>은 7월 10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관람할 수 있다. 대림미술관의 <유르겐 텔러 사진전-터치 미>는 7월 31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