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관>국립극단 "오이디푸스"> 오이디푸스,부르튼 발로 삶의 종말까지 방랑하는 눈먼 자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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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퇴회원)
등록일 2011.01.24
조회 2127
삶에 대한 통찰이 시작되면 비관적이 된다.결국 그 모든 것을 집어삼키게 되는
유한한 삶에 대한 각성 앞에 그 무엇이 유쾌하며 발랄해질 수 있으랴.
무한한 것처럼 보이는 모래알조차 결국 언젠가 끝이 나고 마는 삶의 모래시계가
빛의 속도로 내려가는 그 도저한 절망 앞에서 우리는
종교라는 마약을 기어이 먹게 되고 마는 것이다.
인간의 개인적 의지 따위는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한 채
무심한 듯 뱉은 한 마디,최선이라 믿는 연민어린 선택이
삶을 송두리째 모욕과 절망 속에 패대기쳐지는 상황을 그저
운명이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지 않은가 말이다.
오이디푸스,부르튼 발로 정처없이 떠도는 장님이여,
그대의 모든 일에 끝을 보는 철저한 성품과 예민한 감성,강한 실천력이라 할 치열한 삶은
기어이 절제없음 또는 오만이란 죄목으로
용서없는,연민없는 신의 날카로운 비수에 눈이 찔려 피흘리는 우리네의 다른 모습이러니.
성격적인 철저함이 오히려 파멸을 가져오는구나.
언제인지도 어디서인지도 모르게 알게 된 그리스 신화 속의 오이디푸스를
소포클레스를 통해 알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라이우스왕과 요카스타왕비 사이의 적자 오이티푸스가
왜 그런 무지막지한 운명으로 태어났을까였다.
어쩌면 동성애자였던 라이우스를 혼내려던 신의 속셈?
혹은 라이우스의 적자가 아닌 요카스타의 혼외정사의 산물이라서?
어쨌거나 신들은 즤들은 근친상간이든 혼외정사든
그 무엇도 거림낌없이 내키는 대로 할 수 있지만
인간이 그러면 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라 여겨 단죄를 하는 것들이니
능히 유추해볼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인간들이 상상 속에서만 허용되는,
즉 신화에서만 가능하다고 믿게 하려는 의도로 퍼뜨린 이야기일까?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나 인식의 범위를 넘어서는 말은
들어도 알지 못하고 보아도 믿지 못하는 법이다.
이번 소포클래스의 오이디푸스가 한태숙 연출가의 손에 달라진 점은 크레온에 대한 해석이다.
좀더 오이디푸스의 입장에서 바라본 크레온이라고 해야할까?
즉 외지출신 왕으로서 정치적 고립감과 불안감에 근거하는 소외의식이 근거없는 것이 아니라
오이디푸스 입장에서 테레시아스의 배후에 크레온의 사주가 있다던 주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생각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요카스타의 장례와 안티고네의 장래까지 책임지겠다는 공언과 만세 합창은
크레온의 대사중 그가 실제로 원하는 것이 권위의 실체이지 그것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며
오이디푸스를 통해 충분히 권력을 향유하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왕이 되어 근심으로 시달리겠냐던 말과 차이가 있게 된다.
또한 소포클레스의 크레온은 매우 신중하고 정치가로서의 경륜이 깊은 성격으로 보여지는데
정동환 크레온은 좀더 공격적이며 열정적인 정치가로 느껴졌다.
비극은 단순히 충격적인 사건의 재현이 아니라
그 사건의 충격적 결말을 통해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균형잡힌 통찰을 얻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한다.
우리의 눈이 인생의 마지막 날을 보기까지는
삶의 종말을 지나 고통에서 영원히 해방될 때까지는
필멸의 인간 어느 누구도 행복하다 기리지 말라는 합창대의 노랫말을 가슴에 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