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관>국립극단 "오이디푸스"> 오이디푸스 창단 공연-오랜만의 연극 관람.
-
작성자 (*퇴회원)
등록일 2011.01.24
조회 2374
정말 오랜만에 ‘연극 한 편’을 보았는데 공연이 끝난 후 관람료가 전혀 아깝지 않은 느낌을 가졌을 때를 기억하기란 나에겐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그만큼 ‘연극 한 편’을 1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정도로 연극을 ‘무척’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은 아니고, 그나마 몇 번 보았던 연극들이 내 기대보다 실망스러웠기 때문에 매번 관람료가 아까워 땅을 치고 후회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런 나도 연극에 대한 지극한 호감을 갖고 있던 시절이 있었는데 딱 10년 전 쯤 대학로에서 본 연극들 때문이었다. 영화와 연극의 팬 수의 간극이 그렇게 크지 않았던 그 때, 연극에 대한 배경지식이 전혀 없는 나는 집에서 가까운 대학로에 가서 제목만 보고 연극을 도박하듯 고를 수밖에 없었는데, 운이 좋았던 건지 몰라도 하나같이 참신하고 놀라운 작품들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대학로에 점점 창작극, 정극을 올리는 극단이 줄어들더니 요즘은 비싼 관람료를 지불해야만 하는 쇼에 가까운 극이나 뮤지컬 공연을 접하기가 더 쉬워졌다. 개인의 차는 있겠으나 그것들을 감상해본 내 경험에 미루어서는 10년 전의 연극들을 보면서 느꼈던 벅찬 흥분을 재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고, 나의 주머니사정을 위협하는 비싼 관람료 또한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최근 오이디푸스 프리뷰 공연을 관람하면서 10년 전의 그 벅찬 흥분을 떠올릴 수 있었고, 그리고 그것에 감사하면서 연극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나지만, 감상의 코멘트를 어렵사리 조금 남겨보고자 한다.
처음으로 무대를 바라봤을 때 느꼈던 생각은 아마 많은 분들도 같을 것이다. ‘무대가 수평이 아니잖아?’. 요즘 3D영화가 인기라지만 이제 연극 무대에서도 저렇게 공간감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목격하고 나니까 관람 전부터 기대감이 일기 시작하였다. 관람을 계속 하면서 들었던 생각은 저 무대가 굳이 공간감만을 살리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극 전체 분위기에 기묘함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었다. 무대에서 배우들이 움직일 때 나는 왜인지 모를 불안감에 사로잡혀 극을 관람하는 내내 배우들의 움직임에 더욱 더 집중하였다. 한 번도 연극을 보면서 느껴보지 못한 신기한 경험이었다.
음산한 얼굴들이 그려져 있는 벽의 존재와 그 벽에 매달려있던 시민들도 인상 깊었다. 바닥조차 불균형한데, 그 위에 벽이 세워져있고, 그 벽에 꽂혀진 봉을 넘나드는 배우들의 연기 또한 아슬아슬했다. 물론 곡예의 수준 정도는 아니었지만 보는 내내 그들의 행동과 말은 불안감을 야기하면서 심정을 불편하게 만들었다.(기분 좋은 불편함) 원래 희곡에는 없는 부분인 그들은 몇몇 부분들을 제외하고는 항상 등장하여 등장인물들의 말을 전부 듣고, 행동을 바라보며 가끔 촌철살인의 대사로써 독설을 퍼붓기도 하고 야유를 하기도 하는데, 그들의 말과 행동이 너무 위태로워서 가끔은 너무 빠르고, 너무 많은 말들을 늘어놓기도 하는 그들을 지켜보았을 때 나는 현재 사이버 상에서 범람하는 눈과 입들, 즉 수많은 ‘당신들’(나를 포함한)을 떠올렸다. 오이디푸스의 ‘시민들’은 인터넷 세계의 ‘당신들’처럼 자동적인 행동과 말을 하고 때로는 논리적이지만 때로는 비논리적이며, 사회의 모든 면을 이제 앉아서(벽에 매달려서) 바라보고, 참견하고, 격려하고, 저주할 수도 있는 존재들이다.
마지막 장면 부분, 크레온이 벽을 열고 그 위에서 내려다보며 말하는 장면은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나 ‘안티고네’ 에서의 크레온을 암시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조금 더 확장해서(오해를 무릅쓰자면) 현재 정치상황, 즉 진보적인 대통령의 죽음과 보수적인 정권이 집권한 현재와 묘하게 맞아떨어진다는 생각도 해보면서 무척 흥미롭게 관람을 마쳤다.
마지막 장면, 예언자의 새는 아폴론처럼 누구보다 높게 앉아서 모든 것을 바라보다가 슬피 울다 사라진다. 마치 정말 인간들을 관조하지만,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는 듯한 신처럼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다. 그 새 혹은 신 또한 이 아비규환을 보면서 인간처럼 절망했을까? 신의 의지는 정말 부재한 것인가? 이렇게 한 사람에게 모욕적이고 가혹한 운명이라는 것이 비단 오이디푸스에만 있는 가공의 이야기는 아니다. 신의 의지가 정말 부재하다면 가혹한 인간의 운명은 모두 인간의 책임인가?
나는 마지막 장면이 나에게 던진 질문들과 절망의 정서까지 가슴 속에 접어 묻고 극장 밖으로 나왔다. 기분은 정말 상쾌했다. 마음이 충만했기 때문이었다. 이건 아주 훌륭한 작품을 감상했을 때 느끼는 그런 감정이다. 아마 그 감정을 지금 여기에 표현하는 것은 나로썬 무리일 것이다. 그 ‘아!’ 라는 탄성을 주위 사람들에게 전해주려 며칠간 노력해봤고, 지금도 이 리뷰를 쓰고 있지만 솔직히 10분의 1도 제대로 표현 못한 것 같아서 아쉽기만 하다. 이 리뷰가 연극을 아직 보지 못한 분들께 감상의 욕구를 불러일으켰으면 하는 바람에서 마지막 말씀을 드리고 싶다. 가끔씩 ‘자신’이 ‘현실’을 살고 있는데도 그것을 충분히 느끼지 못하면서 살고 있을 때가 있다. 그리고 그런 ‘자신’ 혹은 ‘현실’을 제대로 일깨워주는 진정한 예술작품이 있다고 믿는다. 나에겐 ‘오이디푸스’가 그런 작품들 중 하나였다. 나의 마음 속 사전에 내가 좋아하는 수많은 영화들처럼(연극보다 영화를 더 많이 보는 게 사실이니까) 좋은 작품으로 기록될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찾고, 극장 밖을 나왔다. 여러분들도 그러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