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적도 아래의 맥베스> 적도아래의 맥베스 리뷰 <이것은 여자의 푸념일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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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퇴회원)
등록일 2010.10.17
조회 2204
연극을 영화와 다르게 구별짓는 요소는 많이 있지만 그 것은 어떤 단어로 차이를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그들이 내는 목소리는 스피커가 아니라 그들의 입에서 흘러 나오고, 그들이 서있는 공간은 비록 어색하지만 손에 닿을 듯 하다. 그 곳에 서 있는 인물들에게는 영화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현재감이라는 독특한 아우라를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인지 학창시절 우연히 가게 된 몇 번의 관람 외에는 연극 관람이 전무한 나는 이 적도 아래의 맥베스가 시작되면서 극중 인물이 말을 꺼내기 시작할 때 놀랐다. 그들은 대본을 읽는 게 아니라 정말로 그 가상의 세계 안에서 말을 하고 있었다. 예전에 보았던 학창시절의 연극에서 봤던 배우들의 대사를 읽는 듯한 그 느낌에 찝찝함을 느꼈지만 이곳에의 자연스럽고 살짝 과장된 듯 한 말투 목소리 행동은 정말 자연스럽게 나를 극중의 세계로 이끌었다.
어두웠던 조명이 밝아오면서, 두 명의 등장인물이 등장한다. 한명은 젊은이 한명은 40~50대의 아저씨. 두 인물은 매우 친한듯 서로 농담도 하면서 이 연극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이 곳에 등장한다. 이 곳은 태면철도. <적도아래의 맥베스>는 그것의 제목과 같이 태양에서 가장 가깝다고 알려진 적도 아래인 태국, 그리고 그곳의 ‘태면 철도’에서 시작이 된다.
그들은 포로 수용소의 한국인 감시원이었던 김춘길의 증언을 녹화하는 다큐멘터리를 기획하고 있다. 그들이 김춘길씨와 녹음을 하면서 김춘길씨의 회상록이 뒤의 스크린이 올라가면서 시작이 된다.
이곳에서는 옛 태평양 전쟁이 한창 일 때 연합군 포로들을 관리하기 위한 방편으로 한국인 감시원 3000명을 징용했다고 한다. 이러한 공간적 배경에서 극 중의 시간은 해방직후가 된다. 전쟁에서 패한 일본은 그 전쟁의 책임을 이들에게 돌리게 된다. 그리고 이 감옥 안에는 소심하지만 자신의 현실을 알아주길 원하는 조그만 소년과, 어쩔수 없이 사람을 죽이게 되었지만 그 때문에 괴로워 하는 자상한 할아버지, 그리고 과거 수많은 죄수를 폭행했던 한 일본인 장교, 그리고 맥베스를 연극하는 게 꿈인 한 젊은 청년이 있다. 마지막으로 김춘길 씨는 법정 재판에서 풀려났다가 다시 잡혀오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전부 사형수이다.
맥베스를 연극하는 게 꿈인 한 젊은 청년이자 극중인물 박남성은 사형 선고를 받은 후 저녘날, 그의 동료들과 마지막 밤을 보내게 된다. 이곳의 사람들은 한국인으로서 배신자, 역적, 친일파이고, 일본에서는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보호를 받지 못하고, 전쟁범죄인으로서 사형을 받게 된다. 그들은 자신이 죽인 사람들 때문에 슬퍼하고 마음 아퍼 하면서 속죄의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자신의 처지에 비탄하기도 하며, 일본을 위해 일한 자신들을 이런 식으로 처치를 하는 일본에 대해서 분노를 하기도 한다. 그리고 절규한다. “내가 왜 죽어야 하는거야!!!!!!!”
과연 누구를 위한 죽음인가? 운명은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것인가? 어쩔 수 없는 사회 현실 때문에 그들은 전쟁감수인이 되었고, 그로 인해서 고통을 받아야 했던 것인가?
지금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는 배경인 현재에는 젊은 음향스태프와 단호하고 고집센 중년 기획자 간의 갈등이 돋보인다. 그러나 이 둘의 갈등 구조를 자세히 들여다 보자. 젊은 음향 스태프는 다큐멘터리를 찍는데 있어서 연출이라던가 기획되고 조작된 무엇인가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연출되고 기획된 것을 찍는 것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드라마이며 픽션이다. 있는 그대로를 찍어서 그것에서 감동을 줄 수 있는 것 그것이 다큐멘터리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의 의견을 자신의 지위와 권위로 무시해버리는 중년 기획자도 나름의 사연이 있다. 그가 과거부터 찍고 싶어했던 이 다큐멘터리를 찍기 위해서는 자극적이고 시청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이 박히는게 중요하다. 그래야지만 그를 지원해주는 기획에서 지원금을 받고 촬영을 계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기획사조차도 무엇인가의 이유로 인해서 그에게 지원을 하는 게 어렵다고 말을 한다. 춘일씨는 자신의 경험을 그대로 들려주고 싶어하고, 그의 비서는 사장이 불합리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에 불만을 가진다. 대머리 스태프 아저씨는 그의 가족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하고, 그래서 젊은 스태프가 못마땅하다. 그들은 왜 각자의 꿈을 이루지 못한채로 있는 것인가?
다시 사형되기 전날 밤 김춘일씨의 추억으로 돌아온다. 박남성은 그의 동료 수감원 할아버지와 연극을 한다. 그의 젊은 시절부터 간직해 왔던 꿈. 사형되기 전날에도 그리워 하던 그 꿈을 마지막으로 꾸기 시작한다. 맥베스의 한 구절을 연극한다. 그리고 이 대사를 말한다.
“나쁜짓을 하면 좋은 사람 좋은짓을 하면 우스운 사람 이것은 여자의 푸념”
그가 이 대목을 하면서 하는 독백은 그 무대 위에 묘한 기류를 흐르게 한다. 나는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어. 독립투쟁사가 될수도 있었고, 불쌍한 포로들을 때리지 않을 수도 있었어. 포로 감시원 시험에 응시하지 않을 수도 있었어. 이 모든 것은 나의 선택이야.
그는 마지막 순간, 자신의 선택으로 안대를 매지 않고 사형대 위를 올라간다. 그러나 사형대 위로 올라가는 그의 발걸음은 무겁긴 하지만 그의 의지로 걸어간다. 가슴도 드높이 펴고 올라간다. 마지막 순간까지 죽기싫은 발버둥을 치지 않는다. 이것은 그의 선택으로 인한 결과이니까.
맥베스! 마녀의 유혹에 넘어가 어리석게도 그의 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된 어리석고 탐욕스러운 인물! 그의 탐욕스러움과 어리석음으로 인한 그의 비참한 죽음은 우리에게 권선징악이라는 흔하고 평범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해서 마땅히 그래야 하는 교훈을 준다.
그래서 만일 그대가 적도 아래의 맥베스라는 이 연극의 제목을 접한다면 한 탐욕스럽고 어리석은 인물의 그 자신의 탐욕으로 인해 서서히 파멸해 가는 비극이 떠오르지 않은가?
그러나 생각을 달리 해보자면 맥베스 또한 그의 운명에 휩쓸려가는 하나의 나약한 인간에 불과하기도 하다. 그의 선택은 마녀로부터, 혹은 그의 아내로부터 시작되기도 했다. 그 또한 나약한 인간상이며, 그 선택이라기 보단 남들의 결정으로 인해 파멸의 길을 걸어간다. 그러나 그도 알아야 한다. 결국 선택을 한 것은 그 자신이라는 것을.
그리고 나 또한 지금의 내 모습을 이루게 한 내 결정을 사회탓, 부모탓, 성격탓 따위로 돌리지 않았는지 반성하게 된다.
그래서 인지 이 연극의 결말은 매우 해피하게 끝이 난다. 젊은 스태프는 극에서 내내 자신의 의견을 말한다. 그리고 결국엔 자신이 그리는 다큐멘터리를 찍을수 있게 된다. 그로 인해서 김춘일 씨는 자신의 회상을 꾸밈없이 전달할 수 있게 된다. 대머리 스태프아저씨도 돈을 받을 수 있게 된다. 그의 비서도 꾸밈없는 다큐멘터리에 만족한다.
결국 우리들이 자신들의 현실에 만족할 수 없는 것은 맥베스를 연극하고 싶어했던 젊고 꿈많던 청년 박남성의 말처럼 “나쁜짓을 하면 좋은 사람 좋은짓을 하면 우스운 사람 이것은 여자의 푸념”이 아닐까?
내가 좋아하는 시나트라 프랭클리는 그의 명곡 'my way'에서 말한다. “나는 나의 방식대로 살았고, 죽음이 임박한 지금 난 충만한 삶을 살았다고 느낀다네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