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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적도 아래의 맥베스> 선택에 의한 운명인가, 운명에 의한 선택인가
  • 작성자 (*퇴회원)

    등록일 2010.10.17

    조회 1796

 

선택에 의한 운명인가, 운명에 의한 선택인가


-일제 아래 희생된 조선인들의 진실, 그러나 연출의 모순 <적도 아래의 맥베스>

 

 

 

10월 2일부터 14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된 ‘적도 아래의 맥베스’는 재일교포 극작가 ‘정의신’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으로, 일


제의 강요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인해 평생을 전쟁범죄인으로 낙인찍혀 살아야했던 BC급 한국인 전범들의 진실을 그려내


었다. 일본인과 한국인,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선택과 운명… 극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패전한 일본의 전범들과 일제 강점기


에 포로감시원이었던 한국인들을 수용한 싱가포르 창이 형무소에서 새벽이슬처럼 스러진 그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역사란 아무리 객관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더라도 주관적이기 마련이다. 대개는 역사 속에서의 승자의 이야기가 진실이 되는 것이


다. 그래서 더욱이 다른 관점에서 본 패자의 이야기도 승자의 이야기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다. 이 극은 우리가 잘 모르고 있던 한국


인 전범들의 억울한 심정과 가슴 아픈 상처를 한국인 BC급 전범 김춘길이 TV다큐 녹화를 위해 과거를 회상하는 형태로 풀어냄으



로서 관객을 자연스럽게 극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견디기 힘들 정도로 더운 적도지역에서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사형 집행일만 기다리는 전범들의 일상. 하루에 한번 배급되는 비스


킷 두 개로 겨우 버티는 그들은 혹시라도 오늘은 사형날짜가 정해졌을까 매일 두려움에 떤다. 일본인과 한국인,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선택과 운명……. ‘적도 아래의 맥베스’에서 시각적, 청각적, 공간적으로 묘사된 많은 연출은 실로 훌륭하였다. 포로들의 가


엾은 목숨을 앗아간 죽음의 철도의 휑한 모습을 시작으로 관객들까지 소름끼치게 만드는 수용소 문이 열리는 소리, 억울하게 희생


된 많은 사람들의 넋을 기리듯 여기저기 반짝이는 반딧불들. 좁은 무대 안에서 표현된 그 작은 연출 하나하나들이 합쳐져 모두를


극 속으로 동화시켰다.

 



훌륭한 것은 무대 장치 뿐만이 아니었다. 선택할 수 없는 선택에 따른 운명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BC급 전범들을 연기한 배우들의


몸부림과 절규는 관객들을 연극으로 몰입시키기에 충분했다. 특히 사형이 집행되기 전 날 형무소에 울려 퍼진 아리랑은 많은 사람


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155분, 연극 상영시간으로는 길지만 한국인 포로감시원들의 슬픈 사연을 표현하기에는 짧을 지도 모르는


시간. 그 짧은 시간 동안 객석에 앉아있었던 모든 사람들은 정의신 작가가 알리고자 했던 그들의 불행한 삶을 눈으로, 귀로, 가슴으


로 직접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토록 훌륭한 작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아쉬운 점도 없지 않았다. 먼저 극이 시작하기에 앞서 김춘길의 증언이라


는 설정을 빌려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던 포로감시원들의 행각에 관한 진실여부. 작품 이해를 돕기 위한 설정으로 관객들이 자연


스럽게 극으로 녹아들기 위한 배려였을 테지만 막이 내리고 장소가 형무소로 이동하기 전까지 계속되는 지루한 대화와 의미 없는


개그들이 극에 대한 흥미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한창 극에 몰입할 무렵 다시 현실로 돌아와 버리는 작품의 흐름, 관객이 과거에서


현재시점으로 돌아오기도 전에 다시 김춘길의 촬영 시작을 알리는 오카다의 불쾌한 “스타또(Start)”소리……. 반복되는 과거와 현


실의 빠른 교차는 계속해서 극 중 몰입을 방해하였다.

 



마지막으로 작가가 알리고자 한 내용 연출과 극의 제목 간의 부자연스러운 모순은 극이 끝나고서도 계속 석연치 않은 느낌을 주었


다. 다른 한국인 전범들은 모두 자신들의 운명에 의한 선택, 다시 말해 선택할 수 없었던 운명에 대해 억울함을 호소하는 반면 맥베


스 책을 연신 옆구리에 끼고 있는 박남성만은 말을 달리 한다. 자신은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포로감시원이 되


는 길을 선택한 어리석은 맥베스라는 것이다. ‘적도 아래의 맥베스’라, 이 제목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BC급 전범들의 가혹한 운명


의 비극이란 말인가 아니면 단지 어리석은 선택을 한 박남성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인가. 하지만 이러한 점들을 제외하면 기획과


무대장치, 배우 모두에 큰 찬사를 보낼 만큼 우수한 작품이었다.

 



취소될 뻔한 녹화를 마친 김춘길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지팡이를 짚으며 과거 속으로 걸어들어간다. 석방되는 날, 감옥을 나서는


노인모습의 춘길에게 문평은 말한다. 반드시 살아서 이 편지를 다른 이들에게 전해달라고, “꼭 살아서 이문평이 울보긴 해도 전범


이 될 만큼 나쁜 놈은 아니었다고 전해주세요. 누군가 내 편지를 읽고 내 고통을 알아주는 날이 오면 내 가슴에 작은 불빛이 켜질지


도 몰라요…….” 살아야 한다. 거짓말을 해서라도 살아남아서 이 진실을 수많은 사람에게 전해주어야 한다. 세월이 흘러 늙어버린


김춘길의 눈 속에는 여전히 동료들로부터 대신 짊어진 무거운 책임감이 남아있었다. 피할 수 없었던 선택으로 인해 원하지 않은 운


명을 맞은 사형수들의 가혹했던 삶. 이제 그들이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을 그 곳에서 편히 잠들기를 기도하며 반짝이는 반딧불의


여운 속에 막이 내린다…….




20100912_적도아래 포스터최종.jpg
적도 아래의 맥베스

- 2010.10.02 ~ 2010.10.14

- 평일 7시 30분 / 토요일, 일요일 3시 (월요일 공연 없음)

-

- 8세 이상 관람가 // A석 안내- 무대 장치를 넓게 사용하므로, 객석 3층의 경우 무대 일부가 충분히 보이지 않을 수 있사오니 예매 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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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 (탈퇴회원)

    연극을 보면서 우리 역사에 대해 돌아보고 또 잊혀진 이들의 비극에 대해 가슴깊이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좋은 리뷰 잘 읽고 갑니다^^.

    2010.10.17 16: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