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적도 아래의 맥베스> 적도, 그곳엔 반딧불이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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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퇴회원)
등록일 2010.10.17
조회 1873
한일 공동 제작인 <야키니쿠 드래곤>이라는 연극으로 재일교포의 삶을 감동적으로 그려낸 재일교포 극작가 정의신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피해자이면서도 가해자인 사람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또 한 번 전한다.
이 연극은 일본이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연합군 포로들을 감시할 포로감시원으로 조선의 젊은이 3000명을 동원하고 그들은 자세한 내막도 모른 체 각자의 사정과 한 순간의 선택으로 포로감시원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로 포로감시원이 된다. 그들은 일본의 패전 후 일본에선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외면당하고 조선에서는 친일파라는 오해로 외면당하는데 그것도 모자라 B,C급 의 전범으로 몰려 사형 당하고 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던 일본인으로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연극은 시작은 시간이 흘러 2010년의 어느 여름 날, 일본의 한 TV프로그램에서 포로수용소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게 되는데 포로수용소의 감시원이었던 김춘길의 증언과 회상으로 시작된다. 처음에는 무대가 다소 답답하고 좁게 느껴졌었는데 얇은 막이 하나 더 올라 가면서 김춘길이 있었던 수용소가 등장한다. 그리 밝지 않은 조명과 무대에 세트라고는 철문 몇 개뿐 이었는데 그것만으로도 수용소의 냉랭하고 차가운 느낌을 주었다. 교도관들이 들어올 때 마다 들리는 짤랑거리는 열쇠 소리와 무겁게 열리는 철 문 소리에 긴장하는 건 죄수들뿐 만 아니라 관객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짧은 순간의 침묵이 너무나도 길게 느껴질 만큼 수용소의 싸늘한 분위기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적도에 위치해 몹시 더운 날씨임을 관객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배우들은 중간 중간 수돗물로 머리를 감고 발을 닦거나 수건으로 땀을 닦는 연기를 하는 모습이 연출되었는데 쌀쌀한 10월의 가을 날씨였음에도 불구하고 한 여름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많은 양의 대사를 소화하는 것은 물론이고 강인한 카리스마와 사나이다운 인물이었던 남성이라는 역할이 눈에 띄었지만 그 보다 더 공감이 가는 인물은 배달되어지지 못할 편지를 쓰는 문평이었다. 자신의 어머니에게 썼다는 문평의 편지는 전범으로 몰린 그들이 어떠한 오명을 쓰고 있는지 알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문평의 편지를 받는 대상은 어머니라기보다 지금 내가 얼마나 큰 고통을 겪고 있는지를 누군가가 알아주고 이해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쓴 그의 마지막 외침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역사를 다룬다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무겁고 지루해 질 수 있기 때문에 연극의 초반에는 지루하면 어쩌나 걱정했었고 연극의 중간 중간 불이 꺼지고 음악이 흐르면서 배경에는 실제로 재판을 받았던 조선인들의 사진이 나올 때 마다 울컥하는 기분이 들어서 묵직하고 아련한 분위기를 너무 조성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극의 중간 중간 재치 있고 센스 있는 대사들이나 소품들로 인해서 전쟁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조금은 가볍게 표현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사실 연극의 초반부인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과정의 내용에서는 너무 ‘연기’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극중 인물의 감정을 전달하는 호소력이 느껴지기 보다는 무언가를 연기하는 느낌이었는데 극이 진행 될수록 나는 점점 ‘적도아래의 맥베스’에 빠져들고 있었다.
나는 전범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일본에게 동조하고 죄를 지은 사람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는데 이 연극을 통해서 그들이 어떤 이유로 선택을 했는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어렸고 가난했고 멸시 받지 않기 위해서 지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런 보상도 받을 수 없었고 오히려 주홍글씨가 새겨져 버리고 말았다.
극 중에서 사소한 것들 하나하나에서 나는 많은 걸 느낄 수 있었다. 우유와 된장국을 마지막으로 먹고 매운 고추를 먹으며 그 매운 맛을 즐기고 장난치는 그들을 보면서 '살아있다'라는 느낌을 받게 하는건 우리의 생활에 있어서 정말 사소한 것들이라는 생각을 했다. 평소엔 그런 사소함들을 당연하게 여기고 그냥 스쳐 지나갔지만 이렇게 작은 것에 기뻐하고 즐거워 하는 그들을 보면서 나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놓치면서 살고 있나 돌아보게 되었다. 극에서 반딧불이 등장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반딧불은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적도인 태국에서는 항상 빛을 비춘다고 한다. 그리고 그 반딧불은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라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적도의 밤하늘에 빛나는 반딧불을 보며 김춘길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자신의 동료들이라 생각하고 그 반딧불을 향해 김춘길이 나는 살아있다고 그들의 몫까지 살아있다고 외칠 때 마음이 먹먹했다. 이 연극은 단지 전범의 이야기만을 말 하고 있는 게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이 연극이 우리들이 낭비하고 소모하는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연극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또한 순간의 선택과 일제의 압박으로 결정한 일들로 인한 자신의 고통을 알아주고 이해해주길 바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잊혀져가고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관심이 필요한 현대 사회에게 작은 외침을 하는 연극이었다. 전범이라는 꼬리표를 달아야 했던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 이었는지, 그들이 왜 그런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려주고 싶은 게 작가의 의도가 드러났다. 이 연극이 일본에서도 공연되고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적도아래의 맥베스를 접하고 내가 새로운 사실을 느낀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실상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