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적도 아래의 맥베스> 아물지 않은 상처에 대한 회고
-
작성자 (*퇴회원)
등록일 2010.10.17
조회 1716
재일교포 극작가 정의신씨에 의해 쓰여진 연극 [적도 아래의 맥베스]는 역사 교과서에서 배울 수 없었고 구체적으로 다뤄지지 않았던 태평양 전쟁 당시의 한국인 군속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태평양 전쟁 중 일본의 철도 건설 과정에서 포로 감시원으로 징용되어 어쩔 수 없이 동족에게 칼을 겨눠야 했지만 전쟁 종결 후에는 일본인으로 분류되어 국제법에 의해 전범으로 몰린 채 억울한 죽음을 맞는 한국인에 대한 이야기이다.
연극은 한국인 군속 중 한 명이었지만 기적적으로 감형되어 거의 유일하게 사형을 면하고 살아남은 극중 인물 ‘춘길’의 과거를 추적하는 다큐멘터리로 시작한다.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과정 속에서 제작진과 ‘춘길’이 나누는 대화, 그리고 대화를 나누는 과정 중간중간에 나타나는 ‘춘길’의 회상을 통해 당시의 상황과 역사적 사실들을 가늠하게 한다. 회상은 주로 ‘춘길’이 창이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을 당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같이 수감되어 있던 몇몇 한국인 군속들과 일본인들이 등장하며 사형선고를 받고 억울함을 토로하는 등장인물 ‘남성’이나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한국인 군속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일본인 쿠로다와 같은 등장인물들을 통해 당시의 상황과 그들 각자의 입장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연극 [적도 아래의 맥베스]는 이렇게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인지조차 불분명한 상황 속에서 역사의 고아가 되어야 했던 비운의 등장인물들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많은 메시지들을 전달하고 있으며 우리 민족의 상처로 기억되고 있는 역사적 사실과 그 속에서 억울하게 죽어나가야 했던 수많은 사람들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고 있다. 더불어 아직까지도 일본에서는 한국인으로, 한국에서는 일본인으로 취급당하는 재일교포들에 대해서도 우리가 어떤 시선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볼 여지를 남기고 있다. 이 연극을 쓴 극작가 정의신씨 또한 둘 중 어디에도 완벽하게 소속되지 못하는 중간자적인 삶을 살아온 재일교포라는 사실이 그래서 더욱더 특별하게 다가오는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이 연극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셰익스피어의 비극 중 하나인 ‘맥베스’를 소재로 이용하고 있다. 현재의 왕을 죽이고 자신이 왕이 되지만 결국 자기 자신도 마녀의 꾐에 빠져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맥베스’를 통해 연극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한층 더 명확하게 보여준다. 또 ‘맥베스’의 처지가 이 연극에 등장하는 한국인 군속들과 유사하다는 점을 통해 기존의 ‘맥베스’라는 작품을 이 작품에 더함으로써 한층 더 효과적으로 내용을 전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렇듯 [적도 아래의 맥베스]라는 작품은 내용 구성과 소재의 선택 면에 있어서 탁월함을 보였다. 또한 무대의 구성과 배우들의 연기력도 나쁘지 않았다. 순차적 구성이 아닌 과거-현재-과거를 반복하는 전개방식이나 당시의 상황을 상징하는 ‘죽음의 철도’를 무대 중앙에 설치한 구성, 그리고 각자의 입장과 생각을 보는 이들에게 잘 어필한 전달력 있는 배우들의 연기력까지 비교적 잘 짜여진 연극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슬라이드가 올라간 후 등장하는 형무소와 사형대도 인상적이었고 시작과 동시에 등장하는 배우들의 익살과 유머는 연극이 시작한 후 곧바로 연극에 집중할 수 있게 된 요인으로 작용했다.
특히 극의 종반부에서 극중 인물 ‘남성’의 ‘이 모든 것이 어쩌면 나의 선택이었는지 모른다.’는 대사는 또다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이 대사는 강제로 징용을 당한 것을 포함해 자신이 저지른 모든 행동은 결국 선택이 가능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지 못해 일본인들에게 희생당하기만 했다는 후회, 그리고 사형을 하루 앞둔 상황에서도 역시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을 늘어놓으며 결국 자신의 죽음까지도 선택하지 못한 채 사형당하기보다는 이 또한 자신이 선택한 운명의 결과라는 사실을 직시함으로써 마지막 순간만큼은 자기 삶의 주체가 되겠다는 의지를 모두 내포하고 있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고 우리는 모두 매순간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는데 그때마다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지 이 연극은 말해준다.
극의 마지막에서 다큐멘터리 제작팀과 ‘춘길’, 그리고 그의 여비서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춘길’의 형무소 수감 당시의 동료들 더 나아가 당시에 희생되었던 이들을 상징하는 수많은 반딧불들을 보면서 막을 내리는 부분도 인상적이었다. 무겁고 심각한 사형장의 분위기 때문에 자칫 연극이 무겁게 끝날 수 있었지만 이런 구성 덕분에 ‘춘길’의 고백과 더불어 작가가 주고자 하는 희망의 메시지를 볼 수 있었고 몽환적인 분위기 속에서 기분 좋게 작품이 막을 내릴 수 있었다.
전달하고자 하는 역사적 사실과 문제의식은 확실한데 비해 작가와 제작진의 구체적인 의견과 생각을 전달하는 것은 조금 부족했지만 궁극적으로 이 연극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며 우리에게 어떤 주제의식을 요구하는지, 또 우리는 이 연극을 통해 어떤 것들에 대해 생각해봐야하고 어떤 역사적 사실들을 간과해서는 안 되는지 분명하게 이야기해주는 작품이었다. [적도 아래의 맥베스]를 통한 우리 민족의 아물지 않은 상처에 대한 회고는 우리에게 아픔과 더불어 그 아픔 속에서 희망 또한 찾을 수 있게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