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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적도 아래의 맥베스> 자살이 허락되지 않은 사형수의 비창.
  • 작성자 (*퇴회원)

    등록일 2010.10.16

    조회 2001

 

매일을 그렇게 지옥을 삼키며 살아도, 혀는 끈질기게 남아있다. 무슨 하소연이 남아 지나친 옷자락에 무너지고, 지치도록 웃느냐. 불그스름한 살갗을 뚫고 윤기 흐르는 검은 실 치 감아놓고, 절뚝대는 눈빛에 시선이 널을 뛴다. 푹 꺼진 무릎으로 지구를 하나 다 돌고 나서야 입을 떼, 존재치도 않는 영혼에 값비싼 비단을 두르니, 양 다리가 우스워 주저앉고 싶다.

 

 

 

그렇게 대로에 주저앉아 스치는 살결에 쾅하는 울음을 터트리.

 

 

 

   위 글은 내가 연극 ‘적도아래 맥베스’를 보고 난 직후 쓴 것이다. 깊게 숨을 내 쉰 뒤 다시 찬찬히 살펴보면 얼굴이 화끈 달아오를 만큼 감정적인 모양새다. 그 만큼 적도아래 다섯 맥베스는 태양보다 뜨거웠다.

 

 일본인관광객과 물건 파는 한국인이 잔뜩 뒤섞인 혼잡한 명동거리의 지긋지긋한 인생사와 같은 비명소리가 신기할 만큼 산뜻하게 제거된 이곳은 명동예술극장이다. 온통 아이보리색 인조대리석으로 치장된 우아한 공연장에 선뜻 손이가지 않는 포스터가 한 장 크게 걸려있다. 피로한 낯빛에 낮게 소리치는 눈빛을 한 청년은 제대로 면도하지 못해 까칠한 몸을 일본식군복 안에 구겨 넣은 채다. 탄식이 절로 흘러나온다. 또 전쟁이고 또 일본인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10년은 족히 ‘일본인은 나쁜 놈’ 교육을 받아온 80년대 중반 출생자들(전쟁도 식민지도 와 닿지 않는)에게 이토록 지루한 흑백사진이 또 있을까? 게다가 맥베스라니. 끈질긴 세익스피어의 환영이 마치 햄릿의 한복판에 서있는 듯한 괴로움을 선사한다. 이쯤 되면 차라리 욱하는 오기가 치밀어 오르기 마련이다. 그렇게 ‘적도아래 맥베스’ 티켓이 손에 들렸다.

 

 찬찬히 둘러보니 명동거리 한 가운데 널찍이 위치한 예술극장은 상당히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뿜는다. 관람석도 3층으로 이루어져 마치 오페라하우스에 들어선 듯한 착각을 부른다. 하지만 A 석에 앉아 무대를 내려다보니,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혼란스럽다. 한쪽 구석이 시야에서 잘려나간 무대와, 가파른 각으로 층층이 세워진 좌석이 연극이 시작되기도 전에 불안과 불쾌감을 준다. 그리고 뒤이어 섬뜩한 종소리가 극의 시작을 알린다. 마치 관객을 올가미 앞으로 호출하듯이.

 

 

 

  불안한 불쾌감은 연극이 시작되고 나서도 한참동안 지속되었는데, 쉽사리 극에 빠져들기 어렵게 하는 초반 배우들의 어설픈 연기, 특히 불분명한 대사전달과 소위 ‘딕션’이라 일컫는 발음의 불명확, 연극무대 발성의 부재가 불필요하게 진행된 인트로와 대충 빔으로 쏘아 처리한 뒷 배경막에 더불어 실망어린 첫인상을 남겼다.

 

  하지만 곧 놀랍게도 그토록 눈에 거슬렸던 배경막이 마술처럼 올라가며 깊고 삭막한, 그래서 오히려 호기심을 자극하는 본 무대가 펼쳐졌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여러 개의 액자를 만들어 내는 극의 배경은 해방직후, 그러니까 근1945년 언저리에 위치한다. 싱가포르의 한 수용소에 가둬진 한국인과 일본인 전범들이 사형당할 날짜만 세며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는 것이다.

 

 얼핏 80년대 우리나라 군대 내무반과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수용소에는 4명의 동양인이 벽돌색의 낡은 죄수복을 걸치고 제각각 혹은 서로 떠들어 댄다. 대충 어떤 이는 한국인 인듯하고 어떤 이는 일본인 같기도 하지만 명확한 구별은 쉽지 않다. 오로지 분명한 것은 여기 있는 모두는 전범이고 사형수라는 것. 어느새 주인공의 자리를 꿰찬 청년 죄수 하나가 자신의 한국국적을 명확히 하는 대사들과 함께 죄목에 대한 억울함을 한참동안 토해낸다. 옆에서 듣던 다른 이는 그 말을 받아치며 맞장구를 두들겨대고 구석에 작은이는 주저앉아 연신 눈물만 찍어댄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창살 주변을 말없이 걷는 또 다른 한 명. 그 한명에 눈길이 가 박히자 곧 나머지 죄수들의 하소연과 울음은 눈과 귀에서 멀어졌다. 직사각형 죽음의 우리 안에서 그들이 쇠창살을 부여잡고 폭발하는 감정으로 쏟아내는 모든 흥분과 변명, 고통과 분노, 자책과 외로움이 말없는 1인의 고요한 발걸음에 모조리 담겨있었다. 그는 걷는 걸음걸음마다 입으로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말을 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이마엔 한 명도 남김없이 ‘대일협력전범’이라는 보이지 않는 낙인이 새겨져 있었다.

 

 

 

  연극에서 장면의 전환과 함께 반드시 존재하는 암전은 배경을 도맡은 프로젝터 빔의 완벽한 활용으로 긴장의 이완을 효과적으로 예방하는 훌륭한 연출로 치환된다. 이 극에는 암전이 존재하지 않는다. 배우가 교체되고 소품이 옮겨지는 분주함 속에서도 배경 막에 펼쳐지는 당시의 실상을 그린 흑백사진은 다큐 속 든든한 증거자료라도 되는 양 두근거림을 배가시킨다. 흔히 접해보지 못한 낯선 이질감과 지독히 사실적인 노골적 표현이 찡그린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며 오히려 더욱 1차적이고 단순한 감정이입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또한 장조인지 단조인지 구별하기 어려울 만큼 무겁지만 리드미컬하게 흐르는 배경음악 또한 관객의 감정 선을 유지시켜주는 든든한 방패가 된다.

 

 하지만 이렇듯 훌륭히 유지시켜온 긴장감은 의미는 분명하지만 미지근한 템포로 진행되는 다큐멘터리 촬영형식의 인터뷰장면, 즉 현실장면으로 되돌아오면서 급격히 무너진다. 흔히 템포와 텐션을 구분하지 않고 혼용하여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연극에 있어서 배우간의 템포와 텐션은 분명히 구별되어야 할 요소이다. 템포가 빠르다고 해서 반드시 텐션이 팽팽하게 유지되는 것은 아니고, 마찬가지로 템포가 느려진다고 해서 텐션이 늘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건 반복되는 현실장면에서는 느려진 템포와 어색한 배우 간 호흡이 극의 텐션을 잃도록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매번 과거와 현재가 교차되는 때마다 적절치 못한 긴장의 이완이 이루어짐으로써 관객들에게 지루함을 느끼게 하고 극에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가 되어버렸다.

 

 

 

  ‘끼이익 쾅’하는 통상보다 좀 더 과감한 볼륨의 음향효과는 극의 우울함을 배가시키고 다른 모든 감각이 상실된 죄수들이 귀로 매일 느껴야 하는 공포에 대한 접근과 이해를 도와주는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저 새끼가 아직도 살아있었네!”라며 과격한 언행으로 등장하는 석방되었다 다시 붙들린 사형수의 등장은 극의 갈등을 점점 더 고조시켜나간다. 사형수 간에도 일본인과 한국인이 있고 피의자와 피해자가 있다. 상황이 만들어낸 운명적 비극에 따라 흘러들어온 이들의 치열한 항변과 묵묵히 침묵으로 갈등을 일궈내는 이, 무릎을 꿇고 죄수에게 죄의 용서를 구하는 또 다른 죄수. 살인과 사형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피해와 피의의 관계가 어지럽게 뒤섞이면서 각자가 품은 비논리적인 자기사정의 토로로 극의 혼란은 절정에 이른다. 이곳의 사형수들은 모두 유죄이며 동시에 모두 무죄이고, 사형을 두려워하지만 자살은 밖에서부터 또 스스로의 안에서부터 동시에 모두 허락되지 않는다. 창살 없이 문만 존재하는 무대 공간은 마치 죄수들의 그러한 심리상태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효과를 만들어낸다. 분명 그들을 가두는 창살은 없지만 한명도 스스로 나갈 수는 없다. 수용소의 문은 밖으로부터, 두려운 비명소리를 내며 굳게 닫혀있다.

 

 

 

  마침내 어느 두 죄수에게 사형날짜가 선언되고 둘은 깊은 절망에 무릎을 꿇는다. 처형 전날 밤, 그러니까 사형시행 몇 시간 전 깊은 밤에 이들은 한 자리에 모여앉아 덩실덩실 춤을 춘다.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실소와 함께 가슴이 울컥하는 상반되고 묘한 신체반응이 몸 안에서 일어난다. 이것이 재일 교포 연출가가 바라본 한국인의 깊고 시린 ‘한’의 정서인가. 이토록 뻔하고 쉽게 이것이 한이라며, 공감하라며 설득하는 것인가. 가벼움에 웃음이 나면서도 훌쩍이는 많은 주변 관객들의 반응을 보며 어쩔 수 없는 정확한 선택이라며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죽기 전날 제공된 사식에 섞인 매운 고추에 집착하는 한국인 죄수들과 호기심에 먹어보았다 눈물을 쏙 빼는 일본인 죄수.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배꼽이 빠져라 웃는 한국인 죄수들과 함께 웃는 한국인 관객들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이것은 지금 밖으로 비춰지는 우리의 모습이다. 그것은 과거에 어설피 가공되었고 배포되었으며 아직까지도 매우 유효한 것이다. 이 순간 나는 많은 오해들과 왜곡, 그리고 표현성이 결여된 나와 나의 주변을 채운 모든 관객들에게 깊은 갈증을 느꼈다. 목마른 눈을 무대로 옮기자 그 곳엔 태양아래 뜨겁게 몸부림치는 몇 마리의 벽돌색 지렁이들이 전할 길 없는 가슴을 짓이기며 온몸을 바닥에 비벼대고 있었다.

 

 죽음을 앞둔 한국인에게 용서를 비는 일본인죄수가 있었고, 천황이 있는 방향을 향해 절을 올리는 일본인죄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 둘 모두 죽음이라는 커다란 운명 앞에서 같은 방향으로 무너졌다. 뻔한 전쟁이야기 속에서 죽음을 앞둔 사형수들의 뻔한 감정변화, 뻔한 한국인과 뻔한 일본인, 그리고 모조리 그저 사람으로 함축되는 것이라는 싸구려 포장지는 무섭도록 가까운 관객들의 동감에서 비난의 칼날을 무뎌지게 만든다. 내가 위치한 3층 객석에서 내려다본 이 모습들은 너무 아담해서 마치 박물관에서 보았던 유리박스 안에 놓인 작은 소품인형들 같았다. 극은 이와 같은 물리적 거리를 차치하고서라도 관객과 끊임없이 적정 거리를 유지하며 진행되었다. 관객이 앞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상황을 자리에 편히 앉아 내려다보는 형국이었다. 이는 우리가 2차 대전을 포함한 어떤 전쟁이나 그 속에 묻혀 진 많은 이들의 생생한 순간들을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자세를 암묵적으로 재현하고 있는 모습이라 볼 수 있다. 단순히 무관심이라 치부하기에는 너무 가까운, 그러나 참여자라고 하기에는 소극적인 현재의 모습들이 지금 이 자리에서 똑같이 연출되고 있다.

 

 

 

  앞서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현재시점의 다큐멘터리 촬영장면은 연출자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총아라 할 수 있다. 구시대적인 형식이 아직 몸에 남아있는 일본인스텝 한 명과 막 대학을 졸업한 신세대 스텝 한 명의 전형적인 갈등에서 보여주는 특정현안에 대해 각기 다르게 수용, 반응하는 일본 내부의 현실반영. 한국말과 같은 단어를 과장된 일본식 발음으로 표현하는 것이나 촬영에 앞서 항상 ‘스따또’(Start의 일본식 발음)를 외치는 등의 행위에서 약간의 불쾌감과 이질감을 느끼도록 조장함으로써 비슷한 듯 다른 일본인과 한국인의 모습을 투영한 점. 다큐의 완성을 위해 타인과 자신의 개인적 신념의 희생 강요를 당연시 하는 감독과 그의 ‘나중에 사과하러 올게, 지금은 바빠, 감사합니다(형식적인 머리숙임과 함께한 아리가또고자이마스), 그럼 이만,’등의 대사에서 요구되는 뻔한 메타포는 촬영 막바지에 분출되는 돈이라는 이 시대의 가장 강력한 헤게모니와 회사라는 커다란 조직의 ‘상명하복’을 빙자한 책임회피를 당연시 하는 풍토, 인터뷰대상으로 등장하는 할아버지의 치열한 의사소통시도와 과도한 혹은 당연하게 보이는 보호기재를 끈질기게 작동시키는 여비서의 촌극에 모조리 적용된다.

 

 

 

  매 순간 반복되는 할아버지의 정확한 주제문 낭독과 같은 방백은 허망히 드러나는 은유와 장치, 유치할 만큼 진부한 플롯을 통해 우리에게 명확한 메시지를 던진다. 개인적 욕망에 따라 쉽사리 변화되는 자기기준에 맞추어 살고 있는 모두에게 거대한 역사의 흐름과 필연적 상황으로 말미암은 치명적 기준의 가변성이 낳은 결과를 보여줌으로 자기반성의 기회와 기준을 바라보는 성숙한 시선을 제공하는 것이다. 인간의 궁극적 자유에의 갈망을 ‘새처럼 사는 것’이라는 맥베스의 불필요한 인용을 끌어들인 것에 대한 죄 값으로 더 큰 이야기가 혹 가려질까 하는 두려움과 아쉬움이 이 극에 짙게 남아있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끼며, 나는 무대를 향해 짧고 굵은 박수를 몇 차례 보낸 뒤 여전히 혼란스러운 명동거리를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20100912_적도아래 포스터최종.jpg
적도 아래의 맥베스

- 2010.10.02 ~ 2010.10.14

- 평일 7시 30분 / 토요일, 일요일 3시 (월요일 공연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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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세 이상 관람가 // A석 안내- 무대 장치를 넓게 사용하므로, 객석 3층의 경우 무대 일부가 충분히 보이지 않을 수 있사오니 예매 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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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 (탈퇴회원)

    이 공연을 볼지 말지 고민중이었는데, 이글을 보니 더욱 보고 싶게 만드는군요~ 후기 잘보고 갑니다^^

    2010.10.16 1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