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적도 아래의 맥베스> 운명을 거스르지 못한 죽음 앞의 마지막 편지 <적도 아래의 맥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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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퇴회원)
등록일 2010.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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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거스르지 못한 죽음 앞의 마지막 편지 <적도 아래의 맥베스>
10월 2일부터 10월 14일 까지 오후 7시 30부터 대략 155분간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되고 있는 ‘적도 아래의 맥베스’. 이 작품은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일본 전쟁의 패전의 책임을 대신 지고 결국은 사형대 앞에 설 수 밖에 없었던 조선 전범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연극의 작가인 정의신은 재일교포 출신으로 이전에 <야끼니꾸 드래곤> 이라는 작품을 통해 경제 부흥기에 소외된 재일교포의 삶을 그려 화제를 모았다. 그런 그가 세계대전이 끝나고 겪어야만 했던 조선인들의 비극적인 삶 그린 것은 이상할 리가 없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전범이라고 몰리며 같은 조선인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일본으로 부터는 외면당하며 억울한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었던, 그래서 많은 이들로부터 잊혀져온 그들의 비극적인 삶이 더 이상은 무관심 속에서 사라져 가지 않도록 이제라도 우리가 그들을 보듬을 수 있도록 세상에 알리고 싶어 했다.
간단하게 줄거리를 소개 하자면, 일본군에 징집되어 수용소 감시원이 된 김춘길은 일본이 전쟁에서 패한 직후 싱가폴 창기 형무소로 송환된다. 이곳에서 그는 자신의 친구의 자살과 수 많은 한국인이 일본인이라는 누명을 쓰고 사형을 당하게 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된다. 그 또한 별 다른 희망을 갖지 못하고 자신의 신세를 비참해 하며 사형선고만 기다린다. 하지만 그는 결국 사형을 면하게 되고 그 곳에서 억울하게 죽어야만 했던 한국인들을 대신해 그 곳에서의 삶을 알리려 일본의 한 TV제작사의 ‘죽음의 철도’를 배경으로 한 일본군 포로수용소의 감시원에 대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촬영을 하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제목을 중요시 할 필요가 있다. 왜 적도 아래의 맥베스 일까? 작가는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중 하나인 ‘맥베스’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와 ‘적도아래의 맥베스’ 두 작품의 살펴보면 맥베스는 왕이 될 수 있는 운명 이었으나 자신이 직접 왕을 폐위시키고 왕이 되지만 결국 자신도 다른 이에게 죽게 된다. ‘적도 아래의 맥베스’의 등장인물인 조선인들도 전쟁에 나가 여차저차 힘들게 살아가다 죽을 수도 있었으나 일본군 포로수용소의 감시원이 되어 사형대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이처럼 이들은 결국 죽음이라는 운명을 거스르지 못한다. 아마도 작가는 이런 부분에서 한국인 전범을 맥베스에 비유 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럼 ‘적도아래’ 는 무엇일까? 이는 뜨거운 여름의 배경인 싱가폴이란 의미도 있지만, 그들이 마지막으로 느낄 수 있는 햇볕이 사형대 위에서 맞는 죽음 바로 직전을 말한다고 느껴졌다. 다른 이들 보다 더 높은 곳에서 느끼는 강하게 내리쬐는 햇볕. 그러나 그 곳에서 그들은 죽음을 피해 갈 수가 없었다. 결국 작가는 죽음이라는 운명 앞에 순응해야만 하는 조선인들의 비극적인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 연극이 처음 시작할 땐 현재를 배경으로 하며 무대 위에 설치된 ‘죽음의 철도’를 보며 이미 할아버지가 된 주인공 김춘길이 과거를 회상하면서 싱가폴 창기 형무소로 배경이 바뀐다. 조명이 어두워지고 태국 철도의 배경이 나타났던 스크린이 올라가고 뒤쪽에 싱가폴 형무소가 나타나자 무대를 스크린으로 나누어서 현재와 과거를 구별한 무대 장치가 독특하면서 인상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형무소를 비추는 조명으로 인해 뜨거운 햇볕이 내리 쬐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연극 때문인지 배경이 바뀔 때마자 조명이 어두워지고 뒤쪽 스크린에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사람들의 사진 나타나면서 마치 그들의 한을 표현하는 웅장한 음악이 크게 울릴 때는 나도 모르게 숙연해지게 되었다.
이 극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어두웠다. 현재를 배경으로 한 배우들의 소소한 웃음이 없었다면 나에겐 조금 어렵고 무겁기만 한 연극이 되었을 것 같다.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낼 만한 행동이나 말투가 조금은 과장되기도 했지만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들의 감정을 전달하려면 보다 크고 오버스러운 행동이 필요 했을 것이다. 배우들의 연기 또한 인상 깊었다. 나는 특히 사형되기 마지막 날 자신의 동료들 앞에서 우스꽝스러운 연기를 펼쳐 보였던 장면이 기억이 남는다. 어렵고 무겁게만 다가왔던 연극이었는데 조금은 마음 편히 웃을 수 있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목이 터져라 부르던 아리랑은 유난히 더 슬프게 들렸다. 마치 그들의 폐허가 된 삶을 죽기 마지막 날 밤에 세상에 외치는 것 같았다. 연극 초반에 조국은 독립이 되어 다들 기뻐하지만 자신들은 왜 이곳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형날짜만 기다려야 하냐며 울부짖는 그 모습이 안타깝고 너무 불쌍했다.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그들이었다. 집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가족들을 뒤로하고 조국독립의 기쁨을 누릴 시간도 없이 그들은 그렇게 사형대 앞에 서게 된 것이다.
남의 나라 전쟁에 동원되어 사형대로 향하기까지 한없이 비참하고 나약한 존재였던 사람들. 이런 그들의 슬픔을 이제는 우리가 보듬어야 할 것이다. 현재로 돌아온 시점에서 나타난 반딧불이가 작가가 관객에게 알리고 싶은 메시지를 담고 있는 듯 했다. 타향에서 억울하게 죽을 수밖에 없던 한국인 전범들을 상징하는 반딧불이. 이제는 우리가 어둡기만 했던 과거를 왜곡되게 덮으려 하지 말고 어두운 곳에서 빛을 내는 반딧불이 와 같이 그 어둠 안의 사실을 밝혀 진실을 알려야 할 때가 왔다. 아주 조그만 희망조차 허락되지 않고 끊임없이 추락하고 떨어져 결국은 파괴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삶이 이제라도 위로 받을 수 있길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