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적도 아래의 맥베스> 운명의 미궁에 갖힌 가련한 인간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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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퇴회원)
등록일 2010.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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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라비린스'라는 이름의 미궁을 아는가?
테세우스와 미노타우르스라는 이름을 들으면 아마 기억날 듯한 한번 들어가면 절대로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유명한 신화 속의 미궁이다.
그리고 나는 이 극을 보면서 그 미궁을 떠올리게 됬다.
극의 내용은 대충 이러하다.
수많은 전쟁 포로를 희생시켜가면 완성시킨 '죽음의 철도'라 불리는 태면 철도에 대해서 어느 일본 tv 프로그램 제작자들이당시 포로 수용소의 감시원이었던 김춘길을 인터뷰하고 김춘길은 그 과거를 회상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그 날'의 이야기가 극의 주요한 내용이다.
김춘길의 이름과 포로 수용소 감시원이라는 것에서 유추할 수 있듯.
그는 연합군의 포로임과 동시에 일제의 하수인이라는 두가지 속성을 겸비하고
그 때문에 그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채 전범이라는 세상의 적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그러한 결과를 얻는데 정작 김춘길 자신의 의지는 들어가지 않아있다.
과거의 춘길은 결코 스스로의 목숨을 담보로 운명에 거역할 생각은 하지 못한다.
결국 그의 그런 결정은 운명에 휩쓸려 다닐뿐 어떠한 반항도 하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상을 보여준다.
말 그대로 맥베스와 같지 않은가.
맥베스가 마녀의 혓놀림, 아니 운명에 놀아나 결국 스스로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밀어넣은것 처럼
춘길 역시 운명을 거스르지 못 하고 이쪽도 저쪽도 아닌 회색분자로 생을 마감할 위기에 봉착한다.
그러나 작가의 연출은 여기서부터 빛을 발하는듯 하다.
전범 재판을 받아 사형을 당하기 전 가해자, 피해자, 그리고 그 둘 모두에 해당하는 인간상을 모아두고
인간이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보일 수 있는 모습들을 회상의 형식을 빌어 담담하게 그러면서도 처절하게 나타낸다.
허울, 허세를 부리는 인간도.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는 인간도.
죽음이 두렵고 억울한 인간도.
그 어떤 모습을 보이던 그 종착점이 죽음이라는 시점에서 그들의 모습은 점차 하나로 겹쳐보인다.
종래에는 그들 모두가 세상에서 버려진 존재들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며 피해자도 가해자도 없는
그저 아리랑을 부르며 서로에 처지를 슬퍼하는 동지만이 남아있을 뿐 거기엔 더 이상 죽음 앞에 서있는
비장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어떻게든 춘길은 살아남게 된다.
이문평의 편지를 쥐고 50년의 세월을 말이다.
다시금 '그'땅에 선 김춘길의 모습에선 아직도 회한이 느껴지나
다시금 '그'땅에 서도록 만든 일본은 50여년 전의 행동을 반복하며 춘길을 전범으로 몰아세운다.
여기서 작가는 무얼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단순히 일본이 과거의 만행을 잊고 현재까지도 우행을 반복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춘길의 50년전 상념을 표현하고 싶었던걸까?
솔직히 이번이 연극 관람 처음인 나의 얕은 소견으론 이해하기 힘들었다.
어쩌면 둘 다 일수도, 다른 의미가 있을수도 있겠지만 중요한건 개인적으로 이번 연극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 중 하나가 바로 그 장면이었다는 것이다.
무대장치 쪽에선 굉장히 협소한 장소임에도 회상이라는 형식을 빌어 천막을 이용, 장면의 전환을 빠르게 한 점이나 연출자의 생각이겠지만 회상의 내용의 대부분 감옥이라는 점도 관객이 극에 집중할 수 있게 한 좋은 점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적도는 남반구와 북반구를 나누는 기준, 하지만 달리 말하면 적도는 남반구도 북반구도 아닌 어느쪽에도 속하지 못하는 가련한 신세일지도 모른다.
작중 인물들은 어쩌면 아직도 세상에서 버려진채 무관심, 오해의 미궁 속을 헤메고 있을지도 모른다.
허나 극의 종반 춘길이 회상속의 문평, 쿠로다에게 용서 받으며 회한을 털어버리듯
적도 아래의 맥베스도 언젠가 미궁의 출구를 찾아 탈출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