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적도 아래의 맥베스> 저주받은 운명의 희생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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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0.10.14
조회 1797
2차세계대전 당시, 일본은 연합군 포로들을 감시하기 위해 조선인들을 포로감시원으로 동원했다. 그리고 전쟁 종료 후,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은 포로를 학대했다는 이유로 전범으로 간주되었고 그 중 몇몇은 처형되었다. 적도 아래의 맥베스는 그들 중에서 싱가포르 창이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김춘길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태국의 한 기차역에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촬영으로 시작하는 이 극은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며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줄거리는 없다. 그저 옛날얘기 뿐. 현실은 단지 회상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일 뿐이다. 그리고 어느정도 예상이 되는 진부한 이야기.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의 이야기는 누구나 익히 들었을 법한 그런 이야기이다. 좀 그럴듯하길 바랬던 마무리도 시시껄렁하다. 물론 작가가 그리려 했던 것은 전범으로 간주된 조선인들의 이야기일 것이다. 역시 이미 TV같은 매체를 통해 알려진 사실들로 관객들에게 어필하기에는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내용에 대한 불만은 배우들의 감칠맛 나는 연기로 조금은 사그라든다. 힘든 상황에서도 밝은 모습을 보이려 했던 박남성의 연기. 주인공 춘길의 쾌속환복과 함께 온몸을 불사르는 연기. 울보 문평의 동정심을 자아내는 연기. 그리고 서성거리기만 했던 야마가타 타케오의 연기. 야마가타 타케오의 연기는 아마 사람들이 가장 의아해 했을 것이다. 춘길이 몇번이나 죽이려고 했으나 그는 언제나 당당했다. 춘길의 동료를 죽게 한 원인이면서도 그는 당당했다. 일본 제국주의의 표본인 것이다. 그는 아무말 없이 어깨를 펴고 서성거렸고 사형집행 전에나 약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건 결국 한국을 대하는 일본의 태도라고도 보여진다. 그들은 언제나 일본이 과거 우리에게 했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단지 몇몇 소수의 인원들만이 선조들이 행한 것을 자신들이 반성하며 사과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런 점에서 타케오의 연기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리고 회상신 내내 수용소 문이 열리는 소리에 이어 간수들이 들이닥치면 누군가 사형선고가 나오지 않을까 긴장하는 모습은 관객들도 긴장하게 만들었다. 결국 사형선고는 희망을 절망으로 바꾸어놓았다. 다른 수용자들과는 달리 가족의 편지를 받고 풀려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살던 박남성. 그가 사형선고를 받을 때는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허무. 절망. 이 단어는 그 순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생각. 그의 희망은 절망으로 바뀌었고 결국 그는 이 피할수 없는 운명의 피해자가 되고 말았다. 결국은 춘길이 말고 모두가 사형당하고 만다. 운명인 것이다. 피할수 없는 저주받은 운명. 그것이 그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현실로 돌아오면 춘길에게 좋지 않은 질문. 포로를 학대했냐는 질문만 계속되던 다큐멘터리 촬영은 취소되고 만다. 이익만을 보고 흥미있는 내용을 만들기 위한 다큐멘터리는 끝나고 진실만을 담으려는 다큐멘터리 제작이 시작됨으로 막을 내린다.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진다. 거짓을 말하든 진실을 왜곡시키든 결국 드러나는 것은 진실이다. 하지만 그 저주받은 운명의 희생자들에게 필요한 진실은 결국 밝혀지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찾아온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달리 할 것이 없었다. 훗날 밝혀진 진실은 사실 그들에게 아무 의미도 없다. 우리의 인식만 바뀔뿐이다. 그렇다해도 이 작품은 저주받은 운명을 가졌던 맥베스들에게 그것이 위안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지니게 한다. 자신들의 운명을 바꿀 수 없던. 시대에 따를 수밖에 없던 그들에게.
태국의 한 기차역에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촬영으로 시작하는 이 극은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며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줄거리는 없다. 그저 옛날얘기 뿐. 현실은 단지 회상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일 뿐이다. 그리고 어느정도 예상이 되는 진부한 이야기.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의 이야기는 누구나 익히 들었을 법한 그런 이야기이다. 좀 그럴듯하길 바랬던 마무리도 시시껄렁하다. 물론 작가가 그리려 했던 것은 전범으로 간주된 조선인들의 이야기일 것이다. 역시 이미 TV같은 매체를 통해 알려진 사실들로 관객들에게 어필하기에는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내용에 대한 불만은 배우들의 감칠맛 나는 연기로 조금은 사그라든다. 힘든 상황에서도 밝은 모습을 보이려 했던 박남성의 연기. 주인공 춘길의 쾌속환복과 함께 온몸을 불사르는 연기. 울보 문평의 동정심을 자아내는 연기. 그리고 서성거리기만 했던 야마가타 타케오의 연기. 야마가타 타케오의 연기는 아마 사람들이 가장 의아해 했을 것이다. 춘길이 몇번이나 죽이려고 했으나 그는 언제나 당당했다. 춘길의 동료를 죽게 한 원인이면서도 그는 당당했다. 일본 제국주의의 표본인 것이다. 그는 아무말 없이 어깨를 펴고 서성거렸고 사형집행 전에나 약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건 결국 한국을 대하는 일본의 태도라고도 보여진다. 그들은 언제나 일본이 과거 우리에게 했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단지 몇몇 소수의 인원들만이 선조들이 행한 것을 자신들이 반성하며 사과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런 점에서 타케오의 연기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리고 회상신 내내 수용소 문이 열리는 소리에 이어 간수들이 들이닥치면 누군가 사형선고가 나오지 않을까 긴장하는 모습은 관객들도 긴장하게 만들었다. 결국 사형선고는 희망을 절망으로 바꾸어놓았다. 다른 수용자들과는 달리 가족의 편지를 받고 풀려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살던 박남성. 그가 사형선고를 받을 때는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허무. 절망. 이 단어는 그 순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생각. 그의 희망은 절망으로 바뀌었고 결국 그는 이 피할수 없는 운명의 피해자가 되고 말았다. 결국은 춘길이 말고 모두가 사형당하고 만다. 운명인 것이다. 피할수 없는 저주받은 운명. 그것이 그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현실로 돌아오면 춘길에게 좋지 않은 질문. 포로를 학대했냐는 질문만 계속되던 다큐멘터리 촬영은 취소되고 만다. 이익만을 보고 흥미있는 내용을 만들기 위한 다큐멘터리는 끝나고 진실만을 담으려는 다큐멘터리 제작이 시작됨으로 막을 내린다.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진다. 거짓을 말하든 진실을 왜곡시키든 결국 드러나는 것은 진실이다. 하지만 그 저주받은 운명의 희생자들에게 필요한 진실은 결국 밝혀지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찾아온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달리 할 것이 없었다. 훗날 밝혀진 진실은 사실 그들에게 아무 의미도 없다. 우리의 인식만 바뀔뿐이다. 그렇다해도 이 작품은 저주받은 운명을 가졌던 맥베스들에게 그것이 위안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지니게 한다. 자신들의 운명을 바꿀 수 없던. 시대에 따를 수밖에 없던 그들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