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적도 아래의 맥베스> 반딧불이, 우리가슴속에 별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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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퇴회원)
등록일 2010.10.10
조회 2502
10월 2일부터 14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되는 '적도아래의 멕베스'는 세계 2차대전을 끝으로 포로들을 학대했다는 이유로 전범 처리된 역사 속에 잊혀진 조선 포로 감시원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적도아래 지역인 태국을 배경으로 하는 이 작품은, 자신에게 닥친 상황으로 인하여 파멸의 길을 자초한 조선인 B,C급 전범들의 모습을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의 주인공 중 하나인 멕베스에 비유하고 있다.
프로그램을 완성하고자 옥신각신하는 스태프들의 모습과 과거전범들의 사형집행을 기다리며, 그 속에서도 우정을 나누는 이야기가 관객들을 울고 웃기며 전개된다.
따뜻한 인간애를 바탕으로 한국 전통극의 방법을 현대적 맥락으로 부흥시키는 작업을 일관해온 손진책 연출과, 수많은 화제작을 각본, 연출하고, 특히 '야키니쿠 드래곤' 으로 한일양국에서 연극상을 모두 휩쓸어 화제가 되었던 정의신 극작으로, 작품에서 그들의 한국에 대한 지극한 관심과 한국사의 과거로 인하여 피해를 입은 자들에 대한 연민을 엿볼 수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적도아래의 멕베스'는 전범 재판에서 두 번이나 사형을 선고 받았던 한국인 이학래씨가 작품 속 주인공 김춘길의 모델이고, 평생 가슴에 켜켜이 쌓여온 작가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여, 작품의 사실성을 더해 주었다.
"춘길이형, 꼭 살아남아 주세요. 전범이 될 만큼 나쁜놈은 아니였다고 전해주세요. 내 편지를 누구가 읽고서 고통을 알아주는 이가 10년,20년 후에 있기를... 이런 생각을 하면 내 가슴 속에 촛불처럼 작은 불빛이 켜지고 평온한 마음이 되요." 극 중 막내인 문평의 대사를 통해 작가의 의도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작품에서 오른편에 자리 잡은 수돗가는 등장인물들이 물로 가끔 머리를 감기도 하고, 세수를 하기도 한다. 이 모습은 그들의 억울함, 분노, 고통 등을 씻어내는 장치이다. 그들의 허기를 달래주는 유일한 식량인 비스켓 두 장과 유일한 놀이인 바닥에 그려진 오목판은 그들의 열악한 환경을 짐작해 볼 수있다. 간수들이 등장할 때마다 들리는 수용소문 열리는 소리는 극의 긴장감을 더해준다.
"수족관에서 먹이도 주지 않고 가두어 두고 구경만 하다가, 도마 위에 올려놓고 칼을 들었다가는 갑자기 바다로 놓아주었다가 다시 잡아 수족관에 넣는 것 아닌가?" 라고 말하는 춘길의 대사에는 풀려났다가 다시 수용된 춘길의 신세를 물고기에 비유하여 독창적이고 또한 그의 심정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대사에는 비유적인 표현이 많이 사용되었는데, 다시 태어나면 새가 되고 싶다는 문평의 대사에서 어쩔 수없이 포로 감시원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어, 자유로운 존재가 되고 싶은 마음을 보여준다.
극에서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과거로 장면이 바뀔 때마다 극의 뒷 배경에 보이는 실제 전범들의 사진은 그들의 마음을 한번 잠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극의 후반부에 현재의 춘길이 과거의 문평, 쿠로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인상적인데, 춘길이 기찻길을 걸으며 과거를 회상하는 것인지, 아니면 억울하게 죽어 그 곳에 머물러 있는 문평과 쿠로의 영혼들과의 대화인지 긴가민가하게 한다. 어찌되었든 춘길이 동료들에게 자신의 임무를 다 하였음을 알려 그들의 한을 풀어주는 이 장면에서 연출가의 독창성이 엿보인다.
마지막 장면인 밤하늘에 반딧불이가 가득 날아다니는 장면 또한 인상적이었다. 반딧불이는 전쟁으로 인하여 죽은 포로들과, 춘길의 동료인 B,C급 전범들의 영혼이다. 그들은 위로 받지 못해, 그 곳에서 떠돌고 있다. 춘길이 "어서 고향으로 돌아들가시오."하는 대사는 전쟁포로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동료들에게 너희들의 고통을 전했으니 마음을 풀으라는 두 가지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주인공 춘길 역을 맡은 배우 서상원은 작품의 주인공답게 젊은 춘길과 나이든 춘길의 역을 모두 자연스럽게 소화하였다. 또한 자신의 친구를 자살하게 만들었던 야미카와 대립하는 연기도 실감나게 보여주었다. 그의 전작인 '겨울해바라기'와 '햇림'의 다양한 연기경력을 더불어서 이번 작품에도 전작의 캐릭터과 겹치지 않게 춘길 역을 잘 해내어서, 다른 배우들에 비하여 큰 갈채를 받았다.
수용된 전범들 중 막내였던 문평 황태인의 연기는 전쟁 속에 나약한 인물의 모습을 잘 그려내 주었다. 평소 시력이 좋아 안결을 쓰지 않는데, 일명 '울보, 찌질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하여 소품으로 안경을 써서, 그가 정말 그런 이미지로 보일 정도였다. 춘길의 비서역 요시에는 대사를 큰 소리로 잘 전달해 주었지만, 배우들 가운데 충분히 튈 수 있는 홍일점인데도 불구하고 연기가 다소 어색하여 아쉬웠다. 카메라 감독 역을 맡은 오일영은 극의 무거운 분위기를 가끔씩 띄어 주어, 극의 묘미를 더했다.
배우들 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인물은 남성 역을 맡은 정나진이다.
주인공 서상원 못지 않게 주조연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고, 특히 멕베스 연기 후, "멕베스 연극 끝, 왜 박수가 없지?"하는 대사에서 순간 나도 모르게 박수를 칠뻔하였다. 여동생의 편지로 희망을 가지고 신나하던 그의 모습과 사형선고를 받게 된 모습이 대립되어 전범들의 비극을 잘 이해할 수 있게 하였고, 사형소로 끌려가기 전에 온몸을 벗어 샤워하는 장면에서, 연극에 자신의 혼을 쏟는 듯한 모습과 자신감은 관객을 감탄하게 했다. 그의 열정이 배우들 중 최고로 마음에 많이 와 닿았다.
이와 같이 '적도아래의 멕베스'는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전쟁은 끝났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음을 시대를 생생히 묘사하여 보여준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처한 상황에 의하여 파멸을 선택했던 멕베스처럼, 정직한 영혼이 시대의 악의 화신에 의해 파멸하게 되었다.
결국, 자신의 본성때문이 아닌, 그들이 닥친 상황으로 인해, 본래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결과를 만드는, 인간이면서 인간적이지 못한 최악의 단면을 보여 주고있다.
시대의 억압으로 인해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억울하고 비참한 넋을 기리기 위해, 그들이 별이 되지는 못했지만 어두운 밤하늘을 반짝이는 반딧불이가 되어 우리 주위를 맴돌고 있지는 않을까?
그래도 적도아래의 멕베스 중 한사람이라도 살아남아 그들의 원혼을 달래주고 있다.
반딧불이들이여, 이제는 하늘집으로 어서 돌아들 가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