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적도 아래의 맥베스> 배우의 힘을 보여준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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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0.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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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연기를 머금고 먼 곳을 응시하는 남자의 얼굴이 인쇄된 포스터가 단연 돋보였던 연극인지라 기대반
호기심반으로 관람했습니다.
그런데 공연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더군요. 모처럼 잘 정제된, 기본에 충실한 연극을 본 기분이 들었습니다.
연극은 역사상 실제 일어났던 사실, 그러나 이제는 역사 속에 잊혀진 사실을 담담히 풀어내고 있습니다.
일본군에 징집되어 포로수용소에서 포로감시원이 되었던 한 남자의 이야기가 감정에 치우침없이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의 힘으로 끝까지 진지하지만 지루하지는 않은 작품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역사적 사실을 되짚게 하는 무겁고 진지한 주제에, 드라마틱한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남녀간의
애정이 양념처럼 섞여 있지도 않으면서 극에 몰입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배우들의 힘이 아닌가 싶습니다.
특히 멕베스의 대사를 읊조리며 무대 위를 휘저으면서도 인간 내면의 긍정과 나약함을 온몸으로 보여준 남정이나
툭하면 울어서 얻어맞고 놀림감이 되면서도 홀어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희망을 잃지 않고 편지를 쓰던 문평이는
정말 연기라는 생각이 안 들 정도로 최고였습니다. 문평이의 약간 어눌한 듯한 사투리 말투와 두꺼거운 뿔테
안경을 걸치고 내내 훌쩍이는 모습은 정말 어린 남동생이 그곳에 서있는 것처럼 안쓰러운 마음이 절로 들게 하더군요.
이 연극은 원작이나 배우들의 열연 때문에 정말 연극의 맛을 톡톡히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어 그동안 역사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결국은 해피엔딩이어야 한다는 우리의 고정된 결론 공식을 여지없이 깨트려 주기도 했구요.
또 우리가 몰랐던 B,C급 전범들에 대해 잠시라도 생각해보고 잊혀진 역사의 아픔에 대해 공감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는 것도 연극을 본 수확이라면 수확이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