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헤다 가블러 > 리얼리즘 연극의 시초, <헤다가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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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퇴회원)
등록일 2012.05.23
조회 2134
내가 연극을 보기 시작한 것은 대략 작년부터일 것이다.
연극과 영화, 뮤지컬에 대한 아무런 생각도, 나만의 정의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잉여 시간을 때우는 수단에 불과했을 뿐.
아마 내가 연극을 보기 시작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하나는 학교에서 '희곡론' 수업을 들은 것.
또 하나는 명동예술극장 기자단으로 활동한 것.
전자가 연극이라는 세계에 발을 디디도록 만들ㅇ 주었다면,
후자는 그 폭을 한층 넓게 만들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나의 생각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명동예술극장에서 연극을 볼 때마다 내가 낭만 명동in으로 활동하지 않았다면, 과연 내가 이 연극을 선택했을까. 라는 질문이다.
분명 예전의 '나'였다면 이런 연극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겠지.
너무 긴 러닝타임에 내가 모르는 극작가들, 포스터만 보더라도 난해해보이는 스토리.
매달 기사를 포스팅하고 작품에 대해 공부하면서 어느새 나도 모르게 작품이 친숙해지고
작품과 사랑에 빠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왠지 극을 보는 내내 애정어린 눈길을 감출 수 없는 것일런지도.
이번 작품은 여러가지 이유로 많은 사전 조사를 하지 못한 채 보게 되었다.
내가 속한 조가 이 작품을 맡지 않은 탓도 있었고, 시험이다 뭐다 여러모로 핑계거릭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작품을 쓴 작가가 "입센"이라는 사실만으로도 큰 맥을 잡는데는 무리가 없었다.
<헤다 가블러>는 총 2시간 40분의 긴 러닝타임을 가진다.
솔직한 말로 전반부는 조금 지루한 감이 없지 않다.
개인적으로는 작품의 완급 조절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충분히 작품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볼 부분은 대사가 너무 빠른 호흡으로 진행되었고,
오히려 아무런 사건이 없는 부분은 지나치다시피 천천히 진행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 작품의 의미를 어디에서 찾았는지 무척이나 궁금하다.
작품에서 '헤다'를 이기적인 여성, 혹은 팜므파탈, 혹은 악인ㅇ로 몰아부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충분히 이해되고 타당한 여성이라 생각한다.
단순히 헤다가 남편의 성인 '테스만'이 아니라 자기 본래의 성인 '가블러'를 고집했다고 해서 그녀가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여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구의 성을 따르든, 그런것은 아무래도 좋다.
다만, 그녀가 원한 것은 '자유'.
그리고 그 자유를 그녀는 그녀 스스로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에서 찾았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뢰브보르그가 자살하도록 그를 절벽 끝으로 몰고 가고,
그가 자살한 줄로만 알았을 때 그토록 기뻐한 것이다.
누군가에게 자신이 그러한 힘을 행사할 수 있다는 사실에.
누군가를 그렇게 만들 수 있는 힘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에.
자신의 누군가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다른 누군가를 어떠한 운명에 처하도록 만들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에 그토록 기뻐한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입센이 쓴 <인형의 집>이 로라가 그 집을 나가는 장면에서 끝을 맺었다면,
그리고 <유령>이 로라가 집을 나가지 않았다면 어떠했을 지를 썼다면,
<헤다 가블러>는 주체적으로 살고 싶어했던 한 여인의 비극적인 삶을 보여준다.
마치 그녀는 자기 남편을 자기 멋대로 주므르고,
그녀의 미모를 이용하여 그녀가 원하는 대로 마음대로 누리며 사는 듯 보였으나,
그녀가 시종일관 지루하다며 표현한 것은
자신의 삶의 주인은 자신이 아님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삶의 주인이 자신이 될 수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녀는 그녀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생을 마감한다.
스스로 죽음을 택함으로써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녀 삶의 주인이 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입센이 <헤다 가블러>를 쓸 당시보다 한참 후의 시대를 살고 있는 나.
나는 과연 내 삶의 주인인가.
지금 이 순간에도 나에게 거듭 던져보는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