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고전연극탐험Ⅰ "동 주앙"> 좋은 인물, 아쉬운 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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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퇴회원)
등록일 2011.03.18
조회 1923
17세기에 쓰여진 프랑스 희곡 'Dom Juan'의 우리 말 연극이다. 극에서 보여주는 에피소드들, 결말까지 이르는 방식, 인물들의 대사 등 주요한 것들은 대부분 원작을 반영한 것 같다. 다만 동 주앙과 그의 하인 스가나렐 등의 대사에서 꽤 자주 유머러스한 부분이 들어가있다는 점은 특이하다.
원작을 충실히 따라갔다는게 이상한 점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동 주앙'이라는 인물만 알고 있다면 이 작품의 후반부는 상당히 어색하게 느껴질 것 같다. 동 주앙의 입과 행동을 통해 위선자들의 행태를 폭로하던 작품이 석상이 움직이는 순간 판타지가 되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판타지+종교 연극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중세를 이제 막 벗어난 유럽에서 쓰여진 희곡이니 이런 한계의 용납이 가능하지만, 21세기 한국에서 공연되는 연극 '동 주앙'으로는 그리 적절해 보이지가 않는다. 특히 내내 이 작품의 주제처럼 느껴졌던 '솔직함과 위선'이 그러한 마무리로 인하여 의미가 덜어지거나, 같이 판타지처럼 보이게 된 점이 안타까웠다.
어쨌거나 이 작품에서 동 주앙은 여자들을 수도 없이 울리고 다니는 희대의 바람둥이다. 자신의 행각에 대해서 미안해하지도 않고, 굳이 변명하려 들지도 않는다. 왜 여자들을 바꿔가며 만나야하는지에 대해 자신만의 논리를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고, 그를 비판하는 것에 대해서도 주눅들지 않는다. 아버지의 경고에 따라 신앙으로 귀의한 척 하지만, 그것이 위선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며 다른 이들 역시 그런 위선으로 자신을 포장하고 있는 것이라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간단하게 말해서 자신의 욕망에 무척 충실한 사람이며, 그것을 부정하기보다는 솔직하게 드러내는 인물이다. 결국에는 지옥으로 떨어졌지만 (이런 결말은 정말 이 작품의 한계다), 이런 인물이 정말 매력적이지 않나? 욕망에는 충실하면서 솔직하지도 못한 많은 사람들보다야 동 주앙 같은 사람들이 훨씬 인간적으로 순박하고, 더 추구해야할 인간상이다. 상대에게 거짓말을 하면서 농락을 하지만 않는다면, 한 명만 꾸준히 사랑하는 사람이나 동 주앙처럼 여럿을 만나는 사람이나 다를게 없으며,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거짓을 말한 적 없고 그로 인하여 피해를 준 적 없으니, 도덕적으로도 비난받을 일 역시 아니다.
그래서 작품 안에서 동 주앙이 말하는 '위선이라는 가면을 누구나 가지고 있다'라거나 '한 명을 처음 사랑했다는 이유로 다른 여자를 절대 사랑해서는 안된다는 건 말이 안된다'라는 대사들에 완전히 공감이 간다. 사회적 윤리라는 이름으로 억누르고는 있지만 절대 자연스럽지도 않고 사람들이 가면을 쓰고 평생 살아가도록 만드는 규칙에 대한 정면 부정 아닌가. 17세기에 이미 이런 인물을 만들어냈다는 것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동 주앙의 입장과 대비되는 인물이 그의 하인 스가나렐이다.
주인과 하인이라는 관계 때문에 그를 도와주고 아첨하기 하지만, 그의 행각에 대해서 끊임없이 경고를 주고 기회되는대로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코 그는 동 주앙의 논리를 이길 수 없다. 굳이 그가 교육을 덜 받아서도 아니고 계급에 따른 차이 때문도 아니다. 종교와 사회규칙에 따라 동 주앙을 비판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실은 스스로도 그 규칙을 어기고 살며 다만 '아닌 척' 하고 있다는 점을 둘 모두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스가나렐 자신은 실제로 잘 지키는 사람일 수 있을지언정, 동 주앙와 그가 같이 다니며 보는, 그리고 관객들이 실제 바깥 세상에서 겪는 사람 중 대부분은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서 솔직하지도 않은 이들이기 때문에, 스가나렐은 동 주앙에게 계속 밀리고, 관객 역시 동 주앙에 보다 더 공감하게 된다.
그러고보니 그런 결말, 동 주앙이 모든 이들의 저주를 받으며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마무리가 정말 아쉽다.
원작의 공간적 시간적 배경에 따른 한계였을까, 아니면 원작자가 정말 '동 주앙처럼 살면 지옥 간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후자라고 하기에는 그 앞까지 동 주앙이 던져준 논리의 흐름이 너무 완벽하다는 점이 참 거슬린다. 어쨌거나 몇 백년 전의 작품을 공간적으로도 다른 곳에서 다시 무대에 올리는 것이라면, 이왕 작품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변형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다. 캐릭터는 현대적이지만 이야기는 근대를 맴돈다는 권재현 기자의 평이 정확하게 들어맞은 것이다.
동 주앙은 '
트루웨스트'에서 동생 역을 인상적으로 연기했던 이율 씨였다. 그 때와는 완전히 다른 캐릭터였는데도, 정말 잘 어울리게 연기하는 것이, 정말 진정한 바람돌이에 자유로운 영혼을 가지고 있을 것 같은 무대였다. 단 한번도 무대에서 빠지지 않고 작품을 원탑으로 이끌어가야했으니 부담이 많았을텐데도 '동 주앙'을 철저하게 표현하고 드러내는 연기였다. 다만 아쉬운 부분이 마무리 장면에서 '지옥으로 당당히 들어가겠다'는 동 주앙은 좀더 광기 어리고 격정적으로 나타났어야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그 부분에서도 바람둥이 동 주앙 처럼 보였다는 점이다. '트루웨스트'의 마지막 쯤에 보여줬던 광기 어린 연기가 괜찮았을 것 같은데...
동 주앙 못지 않게 오래 등장하며, 동 주앙과의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스가나렐 역의 정규수 씨 역시 좋은 무대였다. 거의 2인극이라고 봐도 될 정도로 두 인물이 극의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스가나렐과 동 주앙의 호흡은 참 좋더라. 다만 가끔 대사를 씹는게 보였다는 점은 좀 아쉽다.
뭐 이런저런 의미를 생각하지 않더라고 재밌게 볼 수 있는 연극이다. 진지한 대사들보다 훨씬 자주 나오는 유머와 곳곳에 숨어있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 진지하게 보더라도, 재밌게만 보더라도 볼만한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