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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적도 아래의 맥베스> 김춘길씨와 우리를 이어주지 못한 태면철도
  • 작성자 (*퇴회원)

    등록일 2010.10.16

    조회 1905

사람이 북적이는 명동 한 복판, 주변의 여타 건물들과는 달리 이질적인 디자인의 명동 예술극장. 지난 2일부터 14일까지 <적도 아래의 맥베스>가 공연된 곳이다.

재일교포 정의신 작가 작품이며, 마당놀이나 2002한일월드컵 개막식등의 연출로 유명한 손진책의 극단 미추가 올렸다.

태국의 태면철도 위의 다큐멘터리 촬영현장에서 극은 시작된다. 일본군 군속으로 포로감시원이었던 노인 김춘길의 증언을 다루는데, 연출가 소다는 자극적인 내용으로 스폰서를 끌려한다. 그런데 갓 영화학교를 졸업한 음향보조 오카다는 진실을 제대로 담지 않는 그의 태도가 불만이다.

춘길의 기억은 싱가포르의 창이형무소로 돌아간다. 한번 풀려났다 다시 잡혀온 그는 가장 친한 친구가 자살한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곳엔 맥베스를 동경하는 박남성과 어린 나이에 군속이 된 이문평,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살인을 저지른 쿠로다 등이 같이 있다.

춘길은 태면철도 건설 당시 자신을 무참히 폭행한 야마가타를 증오하고 그를 죽이려다 그만둔다. 이후, 여동생으로부터 편지가 와 풀려날 것으로 기대하던 박남성은 다음날 야마가타와 함께 사형을 선고받는다. 마지막 밤 그들은 둘러앉아 음식을 나누며 애써 즐거운 척한다. 희곡 맥베스를 끼고 살던 박남성은 쿠로다와 함께 그들 앞에서 어설픈 연극을 한다. 꿋꿋하던 야마가타는 사형 직전 나약하게 허물어진 모습을 보인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 끊임없이 독촉전화를 받던 소다는 제작비가 끊겨 촬영을 관둘 수밖에 없음을 표한다. 그러나 김춘길의 얘기에 흥미를 느낀 오카다가 소다에게 부탁해 촬영을 일임받아 계속해 나가는 것으로 극은 끝난다.

작가인 정의신은 재일교포이다. 일본에서는 한국인으로, 한국에서는 일본인으로 치부되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정체성은 역사적으로 민감한 조선인 전범자들의 문제에 어느 정도 동질감을 느끼는 동인이 됐을 터였다.

주인공 김춘길은 실존인물인 이학래씨를 모델로 삼았으며 그는 실제로 2차 대전 종전 후 2번 사형판결을 받고 2번 감형되었다. 정의신은 그를 취재하고 극작가로서 '기록'으로 남겨야 할 당위성과 책무감을 가졌다고 한다.

<적도 아래의 맥베스>는 그런 억울하게 잊혀진 사람들을 기억하고자 한다. 작가가 알아낸 과거의 사실에 관객들도 따라가게 한다. 그렇게 후반부까지는 지나치리만치 객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민감한 역사문제를 다루면서도, 그러나 진지한 성찰이나 현재 우리가 지닐 의무와 책임은 묻지 않는다. 극의 종반 젊은 피인 음향보조의 목소리를 빌려 실천 의지를 짤막하게 표명 하는 데에 그칠 뿐이다. 단순히 알고 기억하자는 것과, 현실성이 따르지 못하는 실천 의지가 관객에게 얼마나 큰 무게감으로 다가설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춘길의 기억을 따라가고 극의 전체 틀을 완성하는데 쓰인 회상형의 구조 또한 문제가 있다. 과거와 현재를 씨실과 날실로 얽어주지 못하고, 그저 기억들을 꾸미는 데만 사용한 점이 아쉽다.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빠져드는 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어머니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는 이문평이나 사형을 당하는 박남성 등의 이야기는 모두 과거의 기억뿐으로 남은 채, 이 문제를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으로 끌어오지 못하고 있다. 박남성의 사형전날 밤 여럿이 모여 아리랑을 부르는 것 역시 조선인을 보여주기 위한 억지스런 설정으로 느껴진다. 결말의 반딧불이 역시 화려하게 꾸며 감상적으로만 보일뿐, 현실적으로 와 닿진 않는다. 약하지만 꺼지지 않는 희망의 불꽃을 예시하고자 했다면 작가나 연출가의 이상적인 감상으로 관객에게 호소하는 것은 아닌지.

 

극의 제목은 <적도 아래의 맥베스>인데 맥베스에 대해 이렇다하게 나오는 제시가 없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이라 하면 그 이름값만 해도 대단한데, 극 중에서는 맥베스가 갖는 역할이 그다지 크지가 않다. 책을 읽은 사람들도 그렇지만 안 읽은 사람들은 이 제목을 어떻게 수용할지 의문이다. 관객들을 위해 친절한 설명을 곁들일 필요까지는 없다 해도 말이다.

극중의 무대가 되는 싱가포르의 위치가 적도 아래고, 중요인물인 박남성이 끼고 다닌 책이 맥베스긴 했다. 그가 가진 맥베스에 대한 소박하고 순수한 동경을 다뤄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맥베스를 파멸로 이끄는 마녀의 예언과,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행해진 죄악들이 중첩되는 것인가. 어떤 쪽도 명확하진 않은듯하다.

 

연극 무대와 배우들의 연기는 전체적으로 훌륭했다. 무대 앞에 살짝 드러난 철도 뒤의 스크린으로 영상을 입힌 후, 극의 전개를 따라 또 하나의 막이 올라가고 본 무대가 드러나는 것은 참 좋았다. 무대와 그 위에 설치된 소품들은 자칫하면 단조롭게 보일 수도 있으나 오히려 연극 특유의 여백이 주는 여유와 극의 자유로움을 도드라지게 했다. 이런 느낌을 주는 데는 배우들의 연기가 가장 중요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무대 위의 빈 부분을 배우의 열연이 꽉 채워줬다. 과거와 현재가 바뀜에도 무대의 차이가 거의 없게 해서 일관성을 나타내고 끊이지 않는 극 전개의 연결고리로 삼았다.

극의 중심점을 과거에 둔 구성으로, 과거 시점 배우들의 연기가 돋보이며 극을 입체적으로 살렸다.

극 초반에는 관객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삽입한 극 전개에 녹아들지 못한 농담 따먹기, 우스갯소리가 다소 생경하기도 했다. 지나치게 딱딱하거나 적절하지 못하게 과장된 모습으로 현재 시점 배우들의 연기는 아쉬움을 남겼다. 사실을 담은 과거와 메시지를 담은 현재의 얼개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때문인지 의문을 준다.

창이형무소에서의 연기는 훌륭한 부분이 많았다. 힘차게 내지를 때와 약하게 가라앉을 때가 큰 폭의 차이를 보이는 연극 특유의 연기가 돋보였다. 좁지 않은 무대를 폭넓게 활용하는 모습도 자주 보였다. 쿠로다 아저씨 역을 맡은 최용진의 경륜이 묻어나는 안정된 연기와 박남성 역을 맡은 정나진의 또렷한 발성과 정확한 몸짓, 다양한 표정이 참 훌륭했다. 주인공 김춘길 역의 서상원은 과거와 현재의 나이 차이를 이질감 없이 표현해냈고 극 전개에 따른 연기의 완급조절이 매우 적절했다. 배우 이상철이 대사가 거의 없는 창이형무소 간수장을 한 점은 의외였다. 또한 극단 미추의 창단 동인인 배우 이기봉의 연기를 제대로 보여주는 장면이 많지 않아 아쉬웠다.

무대조명은 최소한만 사용되어 화려하진 않으나 배우들의 연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때때로 몇몇 장면에선 조명이 지나치게 절제되어 건조함을 느끼게 했다. 페이드아웃 후 무대 뒤 스크린에 비춰진 역사적 배경이 되는 실제 사진과 배우들의 사진은 음악과 함께 연극에 더 몰입하게 했다.

음향효과는 조명처럼 절제된 활용을 보여줬다. 두껍고 차가운 쇠문이 닫히는 소리와 박남성이 사형당할 때 목줄이 걸리고 몸이 매달리는 부분에 들려오는 섬뜩한 소리는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었다.

 

 

극장 객석은 대부분 대학생들이 채웠다. 이 20대의 젊은 피들이 ‘아, 그렇구나. 이런 일이 있었구나.’ 하고 새롭게 과거를 알게 되는 것도 좋지만, 더 나아가 과거가 현재에 미치고 있는 영향이나 우리가 짊어져야 할 책임과 의무를 깨닫기 바라는 것은 다소 욕심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어쩔 수 없었다고, 그 당시에는 누구나 그랬다고, 살아야 한다고.’ 극중 인물들의 변명과 친일파의 그것이 너무도 닮았음에 놀랐다. 현재의 카메라담당의 ‘나하고 가족이 먹고 살아야 해, 그러면 돈을 받아야 해’ 하는 불평과도 거리가 멀지 않다고 느꼈다.

과거는 보여주기만 하고 성찰은 여러분의 몫이라는 지나치게 태평한 말이 지금 우리에게 통할지 의문이다. 진실 하나면 됐다는 것인지 일부러 던져놓고 마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느 쪽이든 치고 빠지는 모습이 관객에게는 실망감으로 다가온다.

가려지고 숨겨졌던 진실을 드러냈다면, 그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뒤이은 올바르고 당당한 시선까지 보여주길 바라는 것은 너무 커다란 바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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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도 아래의 맥베스

- 2010.10.02 ~ 2010.10.14

- 평일 7시 30분 / 토요일, 일요일 3시 (월요일 공연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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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세 이상 관람가 // A석 안내- 무대 장치를 넓게 사용하므로, 객석 3층의 경우 무대 일부가 충분히 보이지 않을 수 있사오니 예매 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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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

  • (탈퇴회원)

    어찌보면 성찰을 이끌어 내고 결론을 강요하지 않는 태도가 연극의 원래 역할에 충실한 게 아닐까 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2010.10.17 14:48

  • (탈퇴회원)

    잘쓰셧는데 너무 부정적이네여 아무튼 잘보고갑니다~

    2010.10.17 14:36

  • (탈퇴회원)

    긴글인데도 읽다보니 재밌어서 다 읽었네요 ^^ 좀부정적인 시각으로 보셔서 다른느낌을 받았습니다. 잘읽었습니다. 수고하셨어요

    2010.10.16 2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