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적도 아래의 맥베스> 패배한 승리자의 나지막한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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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퇴회원)
등록일 2010.10.16
조회 1759
명동예술극장에서 10월 2일부터 14일까지 선보인 <적도 아래의 맥베스>는 태평양 전쟁에 동원되어 궂은일을 도맡아 한 후 결국 BC급 전범이 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한국 청년들과 그 속에서 살아남았지만 죽음보다 못했던 삶을 살았던 한 청년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연극은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고 후에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났지만 다시 잡혀 또다시 사형 선고를 받고 수감 중에 있었던 일을 회상하는 것과, 현재가 번갈아가면서 진행된다. 첫 장면은 태평양 전쟁 당시 수용소 감시원이었던 김춘길 이라는 인물을 인터뷰하는 것으로 시작한 후 1947년 햇볕이 쨍쨍하던 무더운 여름날 창이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5명, 즉 김춘길, 쿠로다 나오지로, 야마가타 타케오, 박남성, 이문평의 각자의 삶과 사연, 그 당시 시대적 상황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찬 수용소 안의 상황을 보여준다. 때로는 유쾌하게 때로는 진지하게 얼마 남지 않은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중 야마가타와 박남성은 사형 집행 통지서를 받게 된다.
이런 상황을 연기해야 하는 연기자들은 내가 연극을 보면서 집중할 수 있었던 것에 한 몫 했다. 특히 가장 인상적이었던 배우는 이문평역의 황태인 배우와 박남성 역의 정나진 배우이다. 이문평 이라는 극중 인물은 홀로 남아계신 어머니에 대한 죄송함과 그리움, 자신에게 다가올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있는 ,부치지 못할 편지를 쓰며 언젠가는 그 편지가 누군가에게 전달되어 자신의 마음을 알아줄 거라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황태인 배우는 그에 맞게 눈물도 많고 여린 감성을 지닌 이문평 이라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이문평과 다르게 박남성 이라는 인물은 형무소 내의 분위기 메이커랄까, 유쾌한 듯하지만 그렇지만은 않은 어려운 인물이다. 정나진 배우는 이 박남성 이라는 인물의 때로는 진지하고 심각한, 때로는 유쾌한 성격을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연기로 소화해내고 있었다. 다만 아주 조금 아쉬운 것은 노인 춘길을 연기 할 때의 서상원 배우였다. 젊은 춘길은 아주 잘 소화해냈지만 노인 춘길을 연기할 때는 어떨 때는 정말 노인 같다가도 어떨 땐 그 나이에 무색한 목소리 톤이나 속도를 내고 있던 것이 아쉽다. 이것을 제외하고는 배우들의 연기는 흠잡을 데 없이 훌륭했다.
한 가지 더 좋았던 것은 이 극의 시대적 상황 때문에 분위기가 무거울 수 있는데 그 중간 중간 센스 있는 소품, 배우들의 재미있는 대사와 같은 요소들이 군데군데 삽입되어 있어서 간간이 웃음이 나오는 장면들이 분위기가 쳐지는 것을 막았고, 너무 가벼운 분위기로만 지속되지 않도록 분위기 전환이 빨라서 분위가가 한쪽으로 치우쳐지지 않았다. 또 극중 과거와 현재의 전환 시에 나왔던 실제 전범재판을 받은 한국 청년들의 사진과 흘러나오던 노래는 묵직한 무언가를 느끼게 했다.
연극을 보기 전에는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역사, 그것도 전쟁에 관련된 무거운 주제를 다룬 작품이라는 생각에 지루하지는 않을지, 보다가 졸리지는 않을지 걱정이 많이 됐었다. 하지만 보는 내내 나의 걱정이 무색할 만큼 극에 집중하며 빠져들 수 있었다. 야마가타와 남성의 사형집행 전날 밤 비싼 술 대신 우유지만, 한 상 가득 차려진 안주 대신 단출한 된장국이지만 그들끼리의 마지막 밤을 보내며 아리랑을 부르는 모습,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죽은 동료들의 영혼이라며 반딧불을 바라보는 노인 춘길의 모습, 후에 편지가 누군가에게 전해지길 바라며 쓴 문평의 편지를 평생 간직하며 살아온, 그들의 몫까지 살아남아야 했던 결코 편하지 않았던 춘길의 삶을 보며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나도 우리의 안타까운 역사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한국인이라는 것을 느끼게 했다. 우리가 BC급 전범들을 이해하고 다시 생각하게 하는데 일조하는 것이 이 극을 쓴 작가의 목적이라면 조금은 그 목적을 달성한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