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적도 아래의 맥베스> 적도 아래의 맥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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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퇴회원)
등록일 2010.10.16
조회 1888
적도 아래의 맥베스를 보고
정의신 작
재일 극작가 정의신 씨의 신작 ‘적도 아래의 맥베스’를 명동 예술 극장에서 보았다. 1940년대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의 군무원으로 징용 돼 포로들을 관리하는 감시원을 했던 한국인들이 주인공으로 일본의 태평양 전쟁이 남긴 상흔에 대해 말하고 있다.
2차 대전 종전 후 포츠담 선언 결과에 따라 태평양 전쟁의 전범 재판이 유럽, 아시아에서 행해져 일본의 A급 전범은 사형 선고 후 그 유해가 야스쿠니 신사에 안치되었고, BC 급 전범과 군속은 일본의 식민지였던 동남아 각 지의 감옥에서 교수형에 처해지거나 병사하였다. 극 소수의 수감자 만이 감형이 되어 출소를 했는데, 살아남은 한 사람의 옥중수기를 재일 동포 작가 정의신이 직접 대면한 후 희곡으로 쓴 작품이 ‘적도 아래의 맥베스’이다.
100년 전 한일병합으로 식민지 국가였던 조선의 청년들이 전쟁에 징집이 되어, 소위 일본이 대동아전쟁 이라고 일컫는 태평양 전쟁에 참전해 싸웠고, 병사 건 군속이 건 포로수용소 감시원이 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일본인이 아니면서도 전범으로 몰려, 사형 선고를 받고 복역 후 감형이 되어 살아남은 실재 인물의 실화를 다큐멘터리 제작에 참가했던 일본의 참신하고 열정적인 신진 작가의 추적에 의해 진실이 밝혀진다는 내용이다.
연극은 태평양 전쟁 당시 가장 많은 인물이 희생 되었다는 태국의 철도부설 현장에서 전범으로 사형을 받았으나 감형되어 생존한 인물을 다큐멘터리에 출연시키는 것으로 연극을 펼쳐나간다. 극형을 받고 수감중인 전범들이 언제 형 집행이 벌어질 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세익스피어의 맥베스를 연습하는가 하면 사랑하는 가족에게 편지를 쓰기도 하고, 조선인과 일본인 전범이 같은 수용소에 수감되면서 증오와 갈등이 교차하기도 하고, 극심한 열대성 기후와 굶주림 속에서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로 더위와 공복을 식히고 메워보는 고난의 세월이 지속되는 중에 2번이나 사형선고를 받고 2번이나 감형이 되는 주인공이 합류되면서 극의 갈등이 복합구조로 변하고, 중간 중간에 다큐멘터리의 촬영현장이 연결되면서 시종일관 실제 다큐멘터리에 참여하는 듯한 자세로 연극에 몰입하게 되었다. 대단원에서 수용인 두 명의 사형과 주인공의 감형 그리고 주인공이 끝내 밝히기를 두려워 했던 주인공 자신의 가혹행위가, 직업 다큐멘터리 제작자가 아닌 신진 작가에 의해 밝혀진다는 줄거리이다.
식민지의 국민으로 일본인과 똑같이 취급 받아 일본인으로 재판 받고 처형당했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조선인이면서 조선인일 수 없고, 그렇다고 일본인도 아닌 존재, 대 일본 제국의 병사라고는 하지만, 군속으로 이등병보다도 못한 대접을 받는 존재. 설득 당할 수 없는 이유로 그저 죽는 날을 기다리는 포로 감시원들, 그들의 하루하루가 얼마나 비참하고 억울했을지, 고향에 남겨진 가족들을 그리는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을지, 사형 선고를 받고 마지막 날 아리랑을 부르며, 우유로 건배를 하며, 삶의 마지막을 즐겁게 보내려는 사람들을 보면서 마음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꼈다. 제대로 된 역사 라기엔 너무 큰 단어 같고, 내가 겪지 못한 시간 속 존재했던 사람들이 간직하고 왔던 아픔을 이제 와서라도 나부터라도 지나간 시간 속 그 뜨거운 적도 아래에서 머물렀을 그들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되어준 가슴 먹먹한 올바른 연극이었던 것 같다. 지나 간 시간 속 이 땅의 지금의 우리가 있기 까지,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왜이리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게 부끄러운지 모르겠다.
전 후 독일은 모든 죄상을 반성하고 사과했으나 일본은 아직도 역사를 바로 보려고도, 제대로 된 사과를 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조차 외면하고 잊고 있었던 역사를 제대로 응시하면서 그 가운데 억울하게 죽어간 당시의 젊은이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그 역사적 진실을 암묵적으로 용인했고 방치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치욕스럽고 부끄러운 역사라 할 지라도 그 역사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외면한다면, 언제든지 우리는 그런 상황과 다시 마주칠 수 있다. 우리의 과거를 이해하고 응시하는 데 대단한 역사적 소명의식이라던가 지식이 필요한 건 아니다. 아직도 BC급 전범들에 대한 이해, 언제부턴가 기억 속에 묻혀진 우리의 역사에 대한 이해는 미미하고 낮기만 하다. 나, 또한 이 연극을 보게 될 많은 사람들이 묻혀진 우리의 역사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역사 속에 전범이라는 이름으로 잊혀진 그들의 영혼이 편히 쉴 수 있도록 기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