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희곡우체통 낭독회] 춘향목은 푸르다.> '춘향목은 푸르다.' 관람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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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하
등록일 2021.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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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목은 푸르다.> 낭독회에 갔다 왔다.
국립극단의 공연을 관람한 적은 많지만 낭독회에 간 건 처음이었다. 원래 나는 '곧 공연으로 올라갈 작품을 무엇 하러 미리 보러 가는 거지?'하는 생각으로 낭독회는 관람하기를 꺼려 했었다. 그러나 최근 <2020 청소년극 창작벨트 낭독공연 : 무중력 연애, 초록빛 목소리, 맥거핀(온라인 극장)>을 보고는 이러한 생각을 180도 바꾸었다. 낭독은 낭독만의 매력이 있구나. 비록 배우들이 정식 무대에서만큼 활동적으로 움직이진 않지만, 그에 못지않은 강렬한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 등장인물들의 메기고 받는 말, 간소하지만 분명한 몸짓ㅡ그리하여 재미와 감동, 카타르시스. 연극은 계속되고 있었다. 내가 그 치열한 티켓팅을 뚫고 <춘향목은 푸르다.> 관람권을 따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관람 전, 고풍스러운 제목에 옛 정취가 묻어 나오는 작품일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내 예상과는 달리 극은 동시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여의도 개발을 위해 밤섬 폭파와 섬 내 주민 이주가 결정된 1968년을 배경으로 연극은 전개된다. 밤섬을 언제나 간직하고자 하는 주민들과 그곳을 필사적으로 개발하려는 국가기관 사이의 갈등이 극의 메인 플롯이다. 사실 이 플롯 자체는 특별할 거 없다. 이미 닳고 닳은 소재 아닌가. 또 이 플롯이 나아갈 방향(힘없는 주민들의 패배, 그러나 이 패배를 딛고 일어서게 하는 연대의 힘)은 다소간 뻔하기에, 큰 이변이 없는 한 이 연극은 지루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극 초반 '혹시 너무 지루해서 졸면 어떡하지?'하는 걱정까지 했다. 하지만 내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작품을 쓴 홍단비 작가는 매우 영특하다. 뻔한 소재를 가져다가 자기만의 스타일로 승화해 새로운 이야기를 선보일 줄 아는 이다. 대사들에 정감 있는 사투리를 얹고, 이를 등장인물 개개인의 성격에 맞게 적용하여 인물들이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 그래서 나는 호구평의 농담에 한껏 더 웃을 수 있었고, 판계명의 절규에 아낌없이 눈물을 쏟을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밤섬 주민들 전체의 목소리에 주의 집중하게 되었다. "팀 규모, 무대, 예산 등을 상관하지 않고 만들었다"는 극 중 배경도 이 대목에서 한몫 톡톡히 한다. 온 주민이 한 데 어우러지는 굿판, 길이길이 강줄기와 우거진 숲. 극은 관객들의 상상력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이야기에 풀쩍 빠져들도록. 이 이야기가 우리 앞에 현실로서 재현되도록 말이다. 관객들이 마침내 극에 완전히 동화되었다고 판단될 때에는 극적인 전율을 선사하고야 만다. 서브 플롯으로 판계명의 연대기를 다루며 그것을 막간극으로 배치한 선택은 탁월했다. 관람하는 내내 저 막간극의 의미는 무엇인가 호기심을 품었다. 후반부에 메인 플롯과 서브 플롯이 합쳐지며 그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 나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판계명이 내뱉은 "이 이쁜 맘들 뿌리내릴 곳 있어야 하네."라는 대사가 주는 여운은 아직도 기억에 남을 정도다. 연극만이 줄 수 있는 재미가 무엇인지 이 작가는 잘 알고 있는 듯했다.
물론 이 작품에 대해 아무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다. 몇몇 등장인물과 갈등을 너무 얕게 다룬 부분이 있다. 예컨대, 박경은은 왜 농아인가? 굳이 농아여야만 하는 연극적인 이유가 있는가? 또, 최영섭과 정근수의 갈등은 어떻게 그리도 깔끔하게 봉합되는가? 작품의 분량을 늘려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더 자세히 들려줬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했다면 주인공 판계명을 향한 초점이 흐려질 위험성이 있으므로, 현 상태가 최선임을 이해한다.
앞서 내가 지적한 바는 아주 사소한 것이고, 실제로 연극을 관람하면 장점이 단점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너무 많은 것들이 한순간에 변화해가는 시대에 "우리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포착하고자 했다는 작가의 창작 의도에서 나는 그의 진실된 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가 아직 젊으며 이제야 데뷔한 신입이라는 사실이 앞으로의 활동을 기대하게 만든다. 언제까지나 "잔기술 부리기보다 우직하게" 글을 썼으면 좋겠다. 그 길을 걷는 홍단비 작가를 한 명의 관객으로서 열렬히 응원한다. 다음번에는 정식 공연장에서 그를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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