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족> 기교와 기교의 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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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오*수
등록일 2017.04.24
조회 3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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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단이 '근현대 희곡의 재발견' 시리즈 기획의 일환으로 이번에 소개하고 있는 작품은 이용찬의 1956년작인 [가족]이다. 국립극단이 준비한 '근현대 희곡의 재발견' 시리즈의 일곱번째로 선정된 작품이다. 이 작품은 국립극장이 주최했던 장막희곡 공모전의 당선작이다. 1956년 열린 제1회 국립극장 장막희곡 공모전의 수상작으로 선정된 후 1958년에 명동예술극장이던 시공관에서 초연됐다. 2003년 사망한 극작가 이용찬의 데뷔작으로 그를 방송 작가로 이끌어 준 작품이었다. 이용찬은 희곡으로 전문 작가 생활을 시작했지만 텔레비전의 등장으로 방송 작가의 역할을 요구하는 업계와 시대의 분위기에 맞춰 방송쪽에 많은 비중을 두며 이후의 긴 작가 이력을 쌓았다. 그래서 국내의 근대 연극계에서 그의 존재감은 크지 않다.
이용찬의 데뷔작인 연극 [가족]은 전문 작가로 데뷔한 이후 방송과 영화 쪽에 비중을 두었던 그의 드문 희곡 경력으로 남아있다. 이 작품은 1958년 시공관에서 초연 후 레파토리로도 정착하지 못했기 때문에 국립극단이 '근현대 희곡의 재발견'의 취지로 선택하기엔 매우 적절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그야말로 초연 후 수십년 동안 묻힌 근대 희곡인데 전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국립극장의 주최 하에 열린 공모전 수상작으로 당시 명동예술극장이던 시공관에서 초연이 됐으니 수십년이 지난 현재에 발굴의 의미를 보다 각별하게 다질 수 있게 된것이다.
서울에선 59년만의 재공연이다. 이전에 대구에서 재공연 된 적이 있었다. 2004년 5월에 대구에서의 재공연으로 한차례 발굴이 됐었고 올해는 국립극단 기획에 복원된 명동예술극장에서 재공연을 하는것이라 2004년 대구에서의 재공연 때보단 상징하는 바가 커졌다. 가족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제목이 풍기는 상징성 때문인지 2004년에도 5월에 올려졌고 올해도 가정의 달인 5월까지 걸쳐 59년만의 명동예술극장 재공연이 기획됐다.
[가족]은 그닥 유명하지도 않은 작품이고 희곡의 구성에서 뿌리내려진 영향력도 미비할 뿐이다. 그러나 전후 국립극장 주최로 열린 1회 장막희곡 당선작이 당선 기념으로 공연된 일회성 초연 이후 반세기도 넘게 묻혀 있다가 '근현대 희곡의 재발견'의 취지로 초연을 선보였던 명동예술극장에서 국립극단 기획으로 재공연 되는것이다. 발굴 과정의 기록적인 배경이 흥미롭고 뭉클하게 만드는 구석도 있어서 국립극단의 뜻깊은 취지에 동조하고 싶었다. 그래서 역사적인 재공연의 개막 공연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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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찬의 [가족]은 작품적으론 굳이 59년만에 재발견 할 필요까진 없어 보인다. 이번 [가족]은 국립극단이 기획한 '근현대 희곡의 재발견' 시리즈의 일곱번째 주자로 선정된것인데 시리즈가 일곱번째에 이르고 나니 국내의 근현대 희곡 중에선 재발견할만한 작품이 슬슬 바닥을 보이나 보다. 이런 식의 재발견 취지에 걸맞는 수준을 안정적으로 갖추려면 세대와 시대를 관통하는 저력이 있어야 하는데 이용찬의 [가족]에는 시대를 이겨낼만한 동시대적인 보편성이 약하다.
한국의 가족 이야기이고 보수적이고 고집 세고 무뚝뚝한 전형적인 한국 아버지상이나 아버지의 그늘에 기죽어 사는 무능한 장남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공감이 가는 측면이 없는건 아니다. 그러나 작품 전반에 걸친 딱딱한 가부장적 정서와 사회에 대한 옹졸한 시선, 행복한 삶을 추구하려는 인물들의 구태의연한 방황과 선택에서 발생하는 고리타분한 태도는 오늘의 시선에서 곁들인 윤색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만의 낡은 화법에 갇혀 허우적 댈 뿐이다.
1956년 열린 제1회 국립극장 장막희곡 당선작에 초연 후 서울에선 59년만에 재공연이 되는것이고 방송작가 1세대로 꼽히는 이용찬의 데뷔작이다. 재발견 될만한 상징적인 요소는 얼추 갖추고 있는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물 설정이나 세태 반영의 시선, 가족을 중심으로 전하려는 의미 주입 등 구성 자체로 봤을 때 전격적으로 발굴되어 수십년만에 접할 수 있다는것에서 오는 희소가치 이상의 초월성이 너무 떨어진다. 이 작품 아닌 묻힌 근현대 희곡 중 그렇게 재발견 할만한 작품이 없었나?
현재 토월극장에서 재공연 되고 있는 [세일즈맨의 죽음]도 이용찬의 [가족]과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다. [가족]처럼 [세일즈맨의 죽음]도 격변하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버지와 장남이 겪는 가치관의 붕괴와 가족의 굴레를 비극적으로 그리고 있는데 그 [세일즈맨의 죽음]도 그렇게 고전이자 명작이라고 칭송 받고 있음에도 이제는 지금 세대의 공감대를 얻기엔 옛 작품의 낡은 화법과 시선의 한계로 박제된 유물이 되어 버렸다. 근래에 김명곤이 지역색을 입혀 번안했던 [아버지]에서도 느꼈고 현재 볼 수 있는 예술의 전당의 [세일즈맨의 죽음]을 2016년에 봤을 때도 아무리 아서 밀러에 그 유명한 [세일즈맨의 죽음]이라고 해도 세월을 타는건 어쩔 수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목에 거창하게 [가족]을 썼지만 정작 다루는 가족은 출세 지향적인 꼰대 아버지와 자존심만 강한 낙오자 백수 아들의 번민과 방황만을 그렸고 1950년대 씌여진 국산 희곡의 한계인지 아내와 딸은 그저 지질구질 궁상 떠는 못난이 부자의 고뇌를 드라마틱하게 발전시켜주는 보조적 장치로 굳어질 뿐이라 [가족]이란 제목이 무색해진다. 아내나 딸, 며느리가 자기 목소리를 낼 때면 쓸데없이 자존심만 세고 화를 잘 내는 부자의 핀잔과 구박을 당하기 일수다. 이기적인 부자 아래 어머니는 그저 인내하는 모진 한국 어머니상에 갇혀 있을 뿐이고 며느리도 고생을 운명이라 여기며 삼키고 살아야 하는 옛날 한국 여자의 무게를 짊어 지어야 한다. 철 없는 막내 딸은 가족 구성원의 성비 균형을 채우기 위한 용도 이상의 역할 부여가 없다. 그런데도 제목은 [가족]이다.
그나마 견딜 수 있는건 시대 배경을 바꾸지 않고 희곡의 설정대로 전개시켜 시대극의 특징으로 제한된 시선을 무마하고 있다는것이다. 그렇지만 세대와 시대를 관통하는 고전의 저력은 작품 내에서 보이지 않기에 '근현대 희곡의 재발견'으로 삼기엔 과분하다. 거기다 평범한 '가족'의 이야기도 아니지 않나. 책임져야 할 가족들을 이왕이면 더 배불리고 더 풍족하게 살리기 위해서 많은 우리네 가장들은 직업적 야망을 불태우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 작품에 나오는 아버지처럼 누구나 정계에 입문하기 위해 재산을 날려 먹지는 않는다. 평범한 우리 삶의 초상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요, 설정이라서 의도와 달리 보편적 공감대는 후반으로 갈수록 더 약해지고 인간적으로 별로 측은하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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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찬의 [가족]은 내용보단 기교가 더 돋보이는 작품이다. 작품의 발표 당시엔 주제와 보편적 공감대에 호소하는 가정극의 정서에서 힘을 받았겠지만 지금 이 작품을 다시 봤을 땐 주제를 찾기 위한 구성의 기교가 더 눈에 들어온다. 이용찬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영화적인 기법인 플래시 백을 희곡에 도입한 인물로 평가 받는 작가이다. 그의 데뷔작인 [가족]에선 영화와 같은 플래시 백 효과가 집중적으로 사용되는데 죽은 아버지의 시신을 정면에 비추는 장면으로 극을 연 뒤 곧 의문의 살인 사건을 추적하는 미스테리 구성에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플래시 백 효과를 빠른 호흡으로 끊고 붙여가며 극의 밀도를 높인다. 집중적인 플래시 백 효과로 단조로운 구성을 이겨내려 한건데 자칫하면 산만하게 흐를 수 있는 전개를 확신을 갖고 밀어 붙인 현란한 구성의 기교로 드라마의 몰입도를 높일 수 있었다.
젊은 신진 작가의 도발적인 극작 기교가 세련된 감각으로 묻어 나온 성공적인 결과다. 그리고 59년만에 이 작품을 다시 올린 국립극단은 요즘의 무대 기술력을 활용하여 극적인 장면들을 더욱 더 인상적으로 끌어올리는데 일조했다. 잦은 플래시 백 효과 끝에 완성되는 미스테리와 드라마의 절정부가 합치될 때 일어나는 긴장감 넘치는 후반부의 무대 효과는 59년 전엔 기술의 한계로 지금처럼 뽑아내진 못했을것이다. 무대 바닥 전체를 단독 주택의 모양으로 꾸며 붕괴되는 중산층 가정의 비극과 가족의 해체라는 상징성을 부각시켰다. 극 후반부의 극적인 상황에서 평면으로 세워졌던 단독 주택 모양의 바닥을 서서히 기울여 인물들의 혼란과 광기를 부각시킨 장면은 강렬한 시각 효과를 낳는다.
기울어진 무대를 기어 올라가며 자살하려는 아들을 막으려고 동분서주하던 아버지는 마침내 아들의 자백으로 살인사건의 실체를 알아버리고 그 모든 욕망과 헛된 바람의 시작점인, 영원한 보금자리가 될것이라 믿었던 단독주택의 대문 앞에서 심장마비로 돌연 사망한다. 미스테리를 알리는 첫 장면으로 이야기를 되돌리며 입체적인 전환점을 마련한것이다. 미스테리를 알리는 첫 장면과 모든 미스테리가 풀어지는 마지막 장면의 유기성을 통제하는 기교가 탁월하며 절정부의 허탈한 감정도 잘 살렸다. 시종일간 불안정한 울림으로 등장 인물들의 심리를 대변해주는 극적인 음향과 음악 효과도 뛰어나게 결합되어 심리극의 효과를 높였다.
이용찬의 [가족], 그리고 국립극단이 재기획한 [가족]은 제목에서 기인하는 가족의 이야기나 세태 반영에 따른 보편적 공감대는 형성하지도 못했고 시대의 한계로 박제되어 버린 낡은 설정과 인물관계도에서 맴돌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작품 전반을 지배하는 구성의 기법이 뛰어나며 이걸 오늘 날의 기술적 효과로 세련되게 부화시켜서 오늘의 관객과 호흡하는데에는 전혀 지장 없는 작품으로 완성됐다. 깔끔하게 복구시킨 재발견의 결과물이다. 투박하고 정형화된 철지난 가족극의 한계를 섬세하고 치밀한 심리극 정서로 이겨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