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헤다 가블러 > Revolt & Purifi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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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퇴회원)
등록일 2012.05.31
조회 2630
1. Intro
5월 27일 일요일. 하늘은 맑았다.
“오늘은 좀 더우려나?”
이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화창한 아침 햇살 아래 집을 나서는 나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오늘 일정은 생각보다 빡빡했다. 먼저 아침 예배를 드린 뒤, 워드 시험을 치르고, 여자 친구를 만나, 명동으로 가서, 헤다 가블러 라는 연극을 본 뒤, 대학로로 와서, 저녁을 먹고, 학교에 가서 과제를 하면 되겠다고 생각을 하였다. 주말답지 않게,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 날이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여자 친구를 만난다는 생각을 하니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일기예보를 보지는 않았지만, 비가 올 것 같은 날씨도 아니었다. 화창한 날씨의 데이트! 부드러운 아침 햇살처럼 집을 나서는 내 기분은 마냥 들뜨기만 하였다.
2. Shower
“My plays make people uncomfortable because when they see them they have to think, and most people want to be effortlessly entertained, not to be told unpleasant truth…. People who are afraid of being alone with themselves, thinking about themselves, go to the theatre as they go to the beach or to parties ? they go to be amused.”
-Henrik Ibsen
시험을 치르고 상공회의소 건물을 나서는데, 문득 촉촉해진 공기가 피부에 와 닿는 것을 느꼈다. 건물 앞 화단에도 이슬 같이 작은 물방울들이 알알이 맺혀있었다. 이상했다. 비가 올만한 날씨도 아니었데, 공기는 꼭 장마가 끝난 뒤, 화창한 햇살 아래에 불어오는 바람처럼 습했으니까.
‘보통 이 시간에 화단에 물을 주나?’ 좀 의아한 생각이 들었던 것도 잠시, 나는 화창한 햇살에 더해 싱그러워진 공기에 흠뻑 젖어버려, 누군가 화단에 물을 주었겠거니 하고 내 멋대로 상상하고는 약속장소로 향하였다. 아마 그때는, 화단에 있지도 않은 스프링클러 따위를 떠올렸던 것 같다.
여자 친구를 만나 명동예술극장으로 향하였다. 오랜만의 데이트라서 그런지 기분은 무척이나 들 떠 있었다. 공연 시작까지 시간이 좀 남아서, 근처 까페에 앉아 Hedda Gabler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실주의가 어떻고, 이혜영의 연기가 어떻고, 입센의 삶이 어떠했고, 페미니즘이 어떻고 등등. 그런 류의 고상한 이야기들을 한창 재미있게 떠들고 있다가 한 차례 대화의 공백이 생겼을 즈음, 내가 여자 친구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 우산은 웬 거야? 양산이야?”
아까부터 여자 친구의 손에는 작게 접은 우산 같이 조그마한 뭔가가 들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까 잠깐 비 왔었잖아. 가방에 넣으려고 했는데. 깜빡 잊고 계속 들고 있었네.”
“아까 비가 왔었어?”
“몰랐어? 아, 시험 중이라서 그랬구나. 오늘 소낙비가 온다고 그랬거든. 아까 장난 아니었어. 사람들 완전 당황하고. 하지만 난 미리 준비를 했지롱~”
빗줄기는 생각보다 굵었다고 한다. 나는 전혀 몰랐었다. 그냥 스프링클러가 돌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쨍쨍한 하늘 아래에 소낙비가 퍼부어졌던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화단만이 아니라 여기 저기 아스팔트 도로 위에도 물기가 촉촉했는데, 나는 그저 화창한 날씨에 데이트를 한다는 생각에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도 자기는 다행이야. 실내에 있었으니까. 아까 사람들 완전 당황해하던걸?”
3. Revolt
연극은 생각했던 것보다 꽤 길었다. 3시에 시작해서 5시 45분에 끝났으니, 거의 3시간을 공연장 안에 앉아있던 셈이었다. 중간에 인터미션 타임이 한번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몸에 좀이 쑤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일종의 지루함이었다고나 할까?
공연을 보러 가기 전 우리는 Hedda Gabler에 대하여 (비교적) 많은 공부를 하고 갔다. 관련된 논문도 몇 편 찾아서 읽고, 작가 Ibsen의 생애를 통해 작품 속의 인물을 이해해보려는 시도도 해 보았다. 나는 ‘이처럼 노력한 것이 꽤 많이 있으니, 연극도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꺼야’라며 기대를 꽤 많이 했었다. 하지만,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까? 연극은 내 예상과는 다르게, 생각했던 것만큼 그렇게 재미있지 않았다.
이상했다. 무대에 오른 모든 배우들의 연기는 하나같이 최고라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는 아주 훌륭한 것들이었다. 극의 구성도 완벽할 만큼 짜임새 있고 훌륭해 보였고, 극장 시설조차 완벽하다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내용에 대한 이론적인 준비까지 탄탄히 되어 있는 아주 훌륭한 관객이 아니었던가? 모든 조건이 완벽해 보였는데, 왜 나는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던 것일까? 중간 중간 핸드폰을 울려대며 소곤거리기까지 하였던 질 낮은 관객들의 저질행각 때문이었을까? 물론 그것도 큰 이유 중 하나였겠지만, 꼭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왜냐하면 공연이 마친 뒤, 같은 문을 나서는 내 여자 친구의 입에선 너무나도 좋은, 굉장히 재미있는 작품이었다는 찬사들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으니 말이다.
여자 친구와 나는 거의 같은 상황이었다. 공부도 같이 했고, 같은 극장에서, 같은 공연을, 같은 관객들과 함께 보았다. 모든 것이 똑같아 보이는 상황이었지만, 결과는 정 반대였다. 공연 내내 몰입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써야만 했던 나와는 전혀 다르게, 내 여자 친구는 연극에 자연스럽게 몰입이 되어 아주 재미있게 보았다고 말했다. 인문들의 대사 한 토씨 빼먹지 않고, Hedda의 감정에 너무나 깊이 몰입되었다고 말하며, 정말로 재미있었다는 표정을 함께 지어보였다.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눈과 귀에는 그녀를 향한 Hedda의 손짓과 음성이 또렷하게 와 닿았지만, 나에게는 어떠한 손짓도 보이지 않고 어떠한 말도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왜 그랬던 것일까? 왜 Hedda는 그녀의 밝은 미소를 나에게는 보이지 않고, 내 여자 친구에게만 그의 밝은 미소를 보여주었던 것이었을까?
계단을 내려오는 길, 어디가 그렇게 재미있었냐는 나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여자 친구가 답하였다.
“그냥, 전부 다 재미있었어. 나는 Hedda의 심정이 너무나 잘 이해가 가. 나도 아마 그 당시에 태어났으면, Hedda가 느꼈던 그 갑갑함을 도저히 견디지 못했을 걸?”
“그래? 음…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느끼는 구속 같은 거야?”
“음… 비슷해. 나도 살면서 Hedda와 비슷한 느낌을 많이 받았던 것 같거든. 내가 얼마 전에 페미니즘에 관한 논문 몇 편 발제했었다고 했잖아? 그때 공부한 내용이 많이 도움이 된 것 같아. 이 연극이 왜 페미니즘으로 많이 해석이 되는지도 알 것 같고.”
“그럼 결국 남성과 여성으로서의 시각 차이인가?”
“그런가? 나도 그건 잘 모르겠어.”
“응…. 참, 그런데, 살면서 Hedda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는 건 무슨 말이야?”
“아, 여자로 살면 그런 게 있어. 뭔가 굉장히… 답답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사실, 외부적인 상황이라든지 남들의 시선이 그렇게 만들기도 하지만, 내 스스로가 나를 그렇게 만들기도 하거든. 뭔가 좀, 그런 갑갑함 같은 게 있어.”
여자 친구는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갑갑함’을 설명하기가 어려운지, 미간을 약간 찡그려 보였다.
문득, 예전 일들이 떠올랐다. 내 여자 친구는, 굉장히 자유로우면서도 지혜롭고, 부드러우면서도 굳은 성품을 지닌 그런 여자였다. 나는 그녀의 그러한 모습에 반해버렸고, 사귀고 난 이후에는, 내가 반해버렸던 그 친구 본연의 이러한 모습들이, 자칫 ‘결혼’이라는 굴레에 얽혀 잃어버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늘 있었다. 그래서였는지, 가끔 여자 친구와 결혼 이야기가 오갈 때가 있었는데, 나는 그때마다 ‘네가 결혼을 한다 하더라도 계속 사회생활을 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고는 했다. 그때마다 내 여자 친구는 고맙다고 말하며 간단히 웃어넘겨버리곤 했지만, 아주 잠깐 생각에 잠긴 듯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때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이었을까? 새삼 궁금해졌다.
생각의 초점은 다시 Hedda에게로 향하였다. 극 중 비춰지는 Hedda의 모습은, 내 여자 친구와 달리 썩 그렇게 매력적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자유를 추구하고 갈망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내 여자 친구의 모습과 아주 흡사한 면이 있었던 것 같다. 아니, 사실 그것은 나와도 매우 흡사한 면이 있었다. 하긴. 자유를 추구하고 갈망한다는 것은, 여성인 Hedda와 내 여자 친구에게만 있는 독특한 특성이 아니지 않은가? 그것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천성인 것이다.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속성. 하지만, 누구에게나 허용되지 않는 차별적인 환경.’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나와 내 여자 친구에게 차별적으로 느껴졌던 Hedda의 모습들과 그 이질감의 정체가 조금씩 손에 잡히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누구나 자유를 갈망한다. 그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공통적으로, 평등하게 갖고 태어난 본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사회는 어떤가? 누구나 갖고 있는 그 천연의 본성을, 과연 누구에게나 허락하고 있는 자유로운 공간인가? 아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공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자유롭게 숨 쉬고 활동할 수 있는 세계는 모두에게 똑같이 허용된 것은 아니다. Hedda가 살고 있는 그 크나큰 저택을 생각해보면, 차별적 사회에 대한 이해는 보다 더 명료해진다. Hedda의 저택은 남성들에게는 단순히 별 의미 없는 ‘그냥 공간’이지만, Hedda에게는 다르다. Hedda에게 그것은 본성을 짓누르고 있는 커다란 감옥, 혹은 작디작은 닭장과도 같은 일종의 ‘구속’인 것이다. Ibsen은 극 초반부에서 성급한 결혼으로 무료하고 지루한 일상을 보내는 Hedda의 모습을 통해, 그녀가 숨 쉬며 살아가고 있는 저택을, 뢰브보르그, 테스만, 드라크 판사를 통해 보여지는 그들의 세계와 엄연히 다른 공간으로 그리고 있던 것이다.
저택의 공간. 그것은 이야기 내내 아주 상대적이고 차별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테스만과 뢰브보르그, 드라크 판사의 공간이 그들 스스로의 활동 범위에 따라 결정되는 유연하고 적극적인 공간이라면, Hedda의 공간은 온갖 관습과 전통, 그리고 알 수 없는 타인의 시선과 같은 요소들에 의해 그 틀이 결정되는 수동적이고 압박적인 공간으로 정의된다.
내 여자 친구가 느꼈던 여성으로의 ‘갑갑함’이라는 것은, 이런 압박적인 공간을 함축하는 표현이 아니었을까? 나는, Ibsen이 ‘저택’이라는 공간을 통해 우리들에게 보여주고자 한 것은, 그와 몸서리칠 만큼 닮아있는 우리들의 실제 사회의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남성으로 태어난 존재들에게는 유연하고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여성으로 태어난 존재들에게는 한없이 구속적이고 견고한 공간, 사회. 여기에서 나는 남성으로서의 나와, 여성으로서의 그녀(여자 친구)에게, 왜 Hedda의 몸짓이 차별적으로 다가갈 수밖에 없었는지 그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Hedda는 이 구속적인 공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을 보이기 시작한다. 극 후반부로 갈수록, ‘테스만의 부인’으로서의 따분하고 무료한 닭장 같은 삶을 벗어나려는 그러한 움직임들은, 너무나 적극적이고 처절하여서, 때로는 파괴적이고 악마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Hedda는 뢰브보르그의 원고를 태워버리며 그의 운명을 결정하려 하고, 때로는 에르우스테드 부인의 인생의 머리채를 휘어 잡으며, 그의 운명에 깊숙이 관여하려는 행동을 보인다. 물론 그러한 Hedda의 시도들은 대부분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 상황은 드라크 판사의 육체적 노예가 되는 파국으로까지 치닫게 되지만, Hedda는 멈추지 않는다. 드라크 판사의 손길을 통해 전해지는 기존의 압력으로부터 더욱 거세게 반발하며, 결국 ‘자살’이라는 가장 과감한 수단을 선택해 자신의 REVOLT를 끝끝내 완수고야 마는 것이다. Hedda의 모습은 비록 그것이 파괴적이고 악마적인 모습이었더라도, ‘기존의 관습에 대한 저항의 몸부림(Revolt against the Convention)’이라는 의미있는 몸짓이었던 것이다.
Ibsen은 대표적인 사실주의 작가로 불리 운다. 그가 그리고 있는 Hedda의 저택의 모습과 우리 사회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 사회 속에서 남성이 나와 여성인 내 여자 친구가 살아 숨 쉬고 있는 공간은, 엄연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권위인 줄은 모르겠지만, 우연히(지극히도 우연히) ‘남성’으로 태어난 순간 나는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 태어난 피조물로서 내 삶의 공간을 마음껏 구성할 자유를 지니게 되는 반면에, 내 여자 친구는 우연히, 지극히도 우연히 ‘여성’으로 태어남에 따라서 그 사실 자체만으로 일평생 기존의 사회와 대립해야 하는 위치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 경쟁과 싸움의 커다란 장(場)에 내몰린다. 하지만 남성으로서 내가 해나가는 싸움은 나의 공간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한 싸움이고, 여성으로서 그녀가 해나가야 하는 싸움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싸움인 것이다. 극 중 Hedda의 저택이 Hedda와 테스만에게 서로 다른 얼굴을 보여 주듯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 역시 나와 내 여자 친구에게 서로 다른 얼굴을 보여 주고 있다. 왜 Hedda는, 나에게는 아무런 말도 몸짓도 건네지 않은 채, 내 여자 친구에게만 커다란 의미가 담긴 말과 몸짓을 건네었을까? 이제는 이러한 괴리감의 정체가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그것은 바로 내가, ‘Hedda의 공간’의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할 만큼, ‘남성’이라는 공간 속에 함몰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벼운 데이트 꺼리를 기대했던 나에게, 무겁디무거운 생각 꺼리를, 존재론적인 고민을 던져 준 Ibsen에게, 순간 야속한 마음이 들었다.
4. Purification
“Everything I have written has the closet possible connection with what I have lived through, even if it has not been my actual experience; every piece of writing has for me served the function of acting as a means of finding spiritual release and purification.”
-Henrik Ibsen
명동예술극장을 나서는 길, 밖에는 또다시 소낙비가 내리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비를 피해 여기 저기 뛰어다니는 사람들, 서둘러 가게를 비닐로 덮는 잡화상들, 처마 밑에서 누군가에게 열심히 통화를 해대는 사람들의 모습들…. 다양한 인간 군상의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생각지도 못한 갑작스러운 소낙비.’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우리 주위에는, 너무나 익숙해져 버려서 그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해버리고 대충 넘어가는 문제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때로는 그것이 남의 운명까지도 가를 수 있는 중요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리 저리 비를 피해 뛰어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문득 아까 시험장을 나서던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화창한 봄날의 데이트라는 익숙한 내 삶 속에만 함몰된 채, 흠뻑 젖은 아스팔트 도로를 뒤로 향해 걸어가던 나의 모습은, 타인의 공간에 대한 최소한의 인식조차 사라져버린 채 자신의 삶 속에만 함몰된 채 비극을 이뤄가던 <Hedda Gabler> 극 중 인물들의 모습과 얼마나 닮아 있었던가! 나는 막이 내린 공연장 문을 나서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남성으로서의 관점에 매몰된 채 Hedda가 자신을 죽음으로 내몰면서까지 보여주고자 했던 ‘여성의 공간’에 대한 메시지를 깨닫지 못하였던 것이다.
Ibsen이 Hedda를 통해 추구하고자 하였던 ‘영혼의 해방과 정화(spiritual release and purification)’란 무엇이었을까? 나는 모른다. Hedda가 작디작은 저택 안에 갇혀 파괴적인 음성을 내기 시작할 무렵부터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이르기까지, 나는 어떠한 대답의 실마리도 찾아내지 못하였다. 하지만, Hedda의 짧은 만남 이후, 답답하리만치 무미건조한 반응을 보였던 나와는 아주 다르게, Hedda의 죽음으로부터 통쾌함, 내지는 후련함까지 느꼈다는 여자 친구의 말을 곱씹어보면서, Ibsen이 말하고자 했던 바를 어렴풋이 가늠해볼 수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