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고전연극탐험Ⅱ "갈매기"> 나는 오늘이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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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지
등록일 2011.05.09
조회 2369
나는 오늘이 행복합니다
갈매기에는 여러 인물이 등장한다. 그들은 이야기하고 그 이야기는 진행된다. 하지만 어딘가 미묘하게 어긋나고 있다. 그들은 서로에게 ‘말’을 하지만 그것은 ‘대화’가 되지 못한다. 모두가 자신의 입장에서 만들어진,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을 내뱉는다. 이런 이기적인 외침의 배경에는 각자의 절망이 깔려있다. 갈매기의 인물들은 그 누구도 행복하지 않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 계속해서 집착하기 때문이다. 노년은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해, 중년은 멀어져가는 꿈에 대해, 청년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꿈에 대해 탄식한다. 인물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화하지 않는 평면적 인물들이다. 물론 집착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샤는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하고 뜨레쁠레프는 권총 자살을 한다. 그러나 “결혼을 하면 깨끗이 잊을거에요.”, “떠나면 깨끗이 잊을거에요.”라고 반복되는 마샤의 말처럼 이것은 도피에 불과하다. 마지막 장면에서도 공허한 외침은 계속된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그들은 모두 멀리 날아갈 수 있지만 안락한 호숫가를 떠나지 못하는 갈매기이다.
반면 니나는 조금 다른 인물이다. 극 초반의 니나는 어린 갈매기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부모님의 보호 아래 호숫가를 한 번도 떠나보지 못한, 아직 날지는 못하지만 꿈을 꾸고 있는 갈매기이다. 어린 그녀는 좋게 말하자면 순수하지만 나쁘게 말하자면 어리석다. 뜨리고린의 삶을 동경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면 그녀가 세상을 전혀 모른다는 것을, 허황된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뜨리고린을 사랑하게 되고 배우가 되기로 확실히 결정한 니나는 모스크바로 떠난다. 나는 법을 배우자마자 그녀는 이상을 향해 먼 길을 떠난다. 하지만 곧 뜨리고린과 무대에 의해 삶이라는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뜨리고린은 후에 자신이 박제해 둔 갈매기를 알아보지 못한다. 희망으로 가득 찬 새하얀 갈매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추락한 니나는 잿빛을 띈 채 호숫가로 다시 돌아온다. 다른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혼란스러워 하고 괴로워한다. 그러나 상처는 그녀를 성숙시켰고 그녀는 또 다른 ‘떠남’을 선택한다. 뽈리냐는 자신들의 시대가 끝났다며 아르까지나를 붙잡고 울먹일 때 그 앞에서 소린은 말한다, “누이동생아, 어쨌든 늦지 않으려면 지금 떠나야 한다.” 그녀는 탄식이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에 지친 날개를 이끌고 비상을 준비한다.
내게 가장 와 닿았던 대사가 위에서 인용한 소린의 대사이다. 극 중에서는 아르까지나가 기차 시간에 못 맞출 것을 염려한 대사로 사용된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앞의 뽈리냐의 대사와 소린이 최고령자라는 것을 고려했을 때 아르까지나를 비롯한 모든 등장인물과 관객들에게 꿈이나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 떠나야, 변화해야 한다는 대사로 들렸다. 그러나 떠남은 쉽지 않다. 우리는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면서도 그곳으로 향하는 길이 힘들고 고달프다는 사실을 알기에 현실에 안주한다. 그리고 그 상황마저 여의치 않으면 엉뚱한 곳으로 도피한다. 연극을 보면서는 뜨레쁠레프의 고뇌와 한숨에만 동감하고 그를 동정하며 니나를 이상한 여자로만 바라보았던 나도 어쩔 수 없는 잿빛 갈매기일 뿐일까. 21살의 시간이 또 하루 지나간다. 늦지 않고, 오늘 또 오늘이 행복하게 빛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