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적도 아래의 맥베스> 그동안 모르고 있었던 과거로 달리는 죽음의 철도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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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퇴회원)
등록일 2010.10.14
조회 1888
명동예술극장과 극단 미추의 공동제작으로 10월 2일부터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되고 있는 제일교포 2세인 정의신 원작의 <적도아래의 맥베스>는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전하고 난 뒤, 포로들을 학대했다는 이유로 전쟁범죄인으로 오명을 쓰게 된 조선인전범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조선인전범들은 일본군에 의해 강제징용 되어 포로감시원이 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운명의 소용돌이에 휩쓸리면서 비극이 된 그들의 인생은 셰익스피어의 '맥베스' 의 운명에 비유된다.
연극은 제2차 세계 대전 시 수많은 연합군포로들과 노동자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태국의 '죽음의 철도' 앞에서 조선인 전범들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현장에서부터 시작된다. 사형수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노인이 된 김춘길의 증언을 통해 현재의 태국 논프라닥역과 과거 싱가포르의 창이형무소의 시공간을 넘나들며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는 전개된다. 다큐멘터리 감독은 자극적인 소재인 김춘길이 포로 학대를 했는지 안했는지의 여부에만 관심이 있다. 그런 감독의 의도를 김춘길의 비서는 탐탁히 여기지않지만 세상에 한국인 전범들의 아픈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자신이 살아남은 유일한 이유이며, 그것이 살아남은 자의 의무라고 믿는 김춘길은 성심껏 인터뷰에 임하며 창이형무소에서 사형수들이 사형선고를 기다리면서 느끼는 공포와 불안, 분노, 그리고 전쟁으로 생긴 상처와 억울함을 전한다. 마지막으로 울보 '문평'이 고향에 홀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썼던 결국에는 부치지 못한 편지를 감독에게 전하며 극은 막을 내린다.
극작가 정의신은 "단지 관객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고 알리고 싶어요. 다만 과거의 일을 보면서 미래에 대한 희망도 떠올릴 수 있다면 더욱 좋겠죠." 말한다. 그리고 연출가 손진책은 "연극적 장치를 가급적 배제했다."고 하며 "잊고 있던 그들의 삶을 기억해야한다는 생각으로 연출에 임했다."고 말한다. 이처럼 극작가와 연출가 모두 연극적인 장치를 배제하면서까지 관객들이 과거의 일을 기억해주기를 바란다. 이 극이 김춘길의 증언을 통해서 전개된 것만 보아도 작가는 연극성보다 역사적 사실과 증언 쪽에 좀 더 초점을 두려고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장면을 바뀌는 중간에 큰 스크린장치를 통해 비친 실제 전범들의 사진이 마치 관객들에게 자신들의 삶을 기억해달라고 말하는 것 같은 느낌 받았다. 이 무대장치를 통해 관객들이 이러한 느낌을 받도록 하는 것이 연출가의 의도라면 굉장히 효과적이 방법이었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무대 위를 적도의 태양처럼 강렬하게 내리 쬐는 조명과 무대 바로 뒤에 서 있는 사형대는 사형수들의 느꼈을 고단함과 공포를 관객들이 간접적이지만 실감나게 느낄 수 있게 했다.
나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배우들의 연기였다. 특히 '남성'이 사형당하는 장면에서 무대가 어두워져서 '남성'을 연기하는 배우 외에는 잘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어둠속에서 어깨를 떨며 흐느끼는 '쿠로다'역의 배우 최용진의 연기를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연기가 아니라 진심으로 슬퍼서 우는 것 같았다. 이 연극에서 관객들에게 과거의 일을 실감나게 전달하는 가장 효과적인 구성요소는 배우들의 열연이었다. 모든 배우들이 각각 맡은 배역을 개성적으로 해석해서 관객들은 극에 더 쉽게 몰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형 전날 밤 사형수들이 모여 먹는 장면에서 진짜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먹는 척을 하는 것이 너무 티가 나서 연극에 몰입하는데 방해가 되었다. 또 너무 역사적인 사실에만 중점을 두어서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 연극을 어려워하고 지루해하는 관객 많았다. 극 중간 중간 웃음을 위한 장면이 있기는 했지만 억지로 관객을 웃기려 하는 느낌이 들어서 어색했다. 더 자연스럽고 공감되는 웃음와 관객들을 사로잡는 긴장감을 더하고 극이 조금만 빠르게 전개되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극을 본 뒤에 그들의 삶을 잊을 수 없어서 조선인 전범들에 검색해보았더니 한국정부가 2006년에 들어 뒤늦게 조선인 전범자들도 강제동원 피해자로 인정하고 이들을 포용하는 정책을 취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들의 처절한 삶을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길 바라던 '문평'의 바람이 너무 늦었지만 이제야 이루어진 것 같아 다행이다.
약간의 아쉬움은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관객들에게 모르고 있었던 과거를 알리고 관객들이 연극을 보고 새로운 인식을 갖게 하려고 했던 극작가와 연출가의 의도가 그대로 전달되었다. 연극을 보면서 그동안 모르고 있었던 그들의 처절한 삶의 모습을 관객들이 기억하고 전쟁이란 무엇인지, 정의는 무엇인지 생각하게 했다는 점에서 <적도아래의 맥베스>는 좋은 연극이라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