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고전연극탐험Ⅰ "동 주앙"> '동 주앙' - 재미와 교훈을 동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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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퇴회원)
등록일 2011.04.05
조회 1948
Dom Juan- 재미와 교훈을 동시에
단 일 초라도 눈을 뗄 수 없던 남자, 그 무엇을 하더라도 신선한 매력으로 다가왔던 남자. ‘동 주앙’은 실로 팔색조란 단어 그 자체였다. 무대 전체를 장악하는 그 모습을 떠올리면 아직도 그 곳의 관객석에 앉아있는 것만 같다. 지난 3월 27일, 공연에 대한 작은 지식 하나 없이 ‘명동예술극장’에 들어선 나는 팜플렛 하나를 집어 들고 차근히 읽어 나가기 시작 했다. 연극이나 뮤지컬에 대해선 관심이 없는 편이라 ‘몰리에르’의 작품이며 ‘최용훈’님이 연출을 맡았다는 사실도, 이 작품이 희극작품이라는 사실도 처음 알았을 정도로 배경지식이 없는 나로서도, 충분히 이해하고 더 깊이 생각할 수 있을 만큼 섬세하고 친절한 연극 ‘동 주앙’. 이제부터 유쾌했던 연극이라고 기억하기엔 너무 아쉬운 이 연극에 대해 간략한 감상과 추천의 글을 적어보고자 한다.
내가 넋을 놓고 바라보았던 ‘동 주앙’의 연기를 맡은 배우는 ‘김도현’님이었고 그의 하인 ‘스가나렐’은 ‘정규수’님, 아버지 역의 ‘동 루이’에는 ‘권성덕’님이었다. 연극 자체가 코미디이지만 인물에 따라 진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관객 모두를 감화시키는 익살스러운 연기, 잠시 숨 고를 틈을 주는 진지한 내면 연기까지도 넘어드는 배우들의 연기술은 보는 내내 감탄을 자아냈다. 진지한 대사만을 읊는 인물도 없으며 웃음만 주고 가는 인물도 없었다. 그 이유는, 사실 이 연극의 주인공은 동 주앙이면서도 그 주변인물들이기 때문이다.
닫힌 결말이기에 더욱 쉽고 이해하기 쉬운 착한 연극 ‘동 주앙’의 시작은 ‘스가나렐’의 연기로 시작된다. ‘담배’ 없이 살 수 없단 내용의 그의 대사로 극이 시작되면 동 주앙이 등장하고, 그의 완벽한 화술로 여인들을 유혹하는 내용이 한참 나오다가, 변장을 하고 떠나는 도중에 자신이 버린 아내의 오빠들이 복수하기 위해 동 주앙을 찾아오는 등 한 동안 정신없이 극이 진행된다. 자신이 죽였던 기사의 무덤에서 움직이는 ‘동상’을 보고는 겁에 질렸다가 얼떨결에 저녁식사를 약속하고, 저택에 찾아온 아버지의 훈계를 듣고 그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위선’의 가면을 썼지만 결국 ‘하나님’의 이치에 맞지 않는 행동만 저지르다가, ‘기사’의 동상이 지옥의 만찬을 맛보게 해주겠다며 지금까지의 인물들이 모두 등장해 그에게 벌을 내려 죽게 되는 내용으로 마무리된다.
하지만 이 연극에서 중요한 건 동 주앙의 죽음이 아닌 그의 대사 하나하나에 담겨있다. 그는 아름다운 여인들을 만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주장하고, 사상적 배경이었던 17세기의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으며, 아버지를 속이기 위해 성경을 들고 가는 등 정말로 ‘감당이 안 되는’ 자유분방한 영혼을 가지고 있다. 하룻밤 만에 맘에 드는 여인이 바뀌고, 결혼을 몇 번씩이나 하고, 맹세의 말을 몇 번씩이나 내뱉는 그는 그 어느 것에도 억압받고 싶지 않아 한다. 그가 믿는 것은 오로지 둘과 둘을 더해서 넷이라는 수학적 진리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여인들의 그의 유혹에 넘어가는 이유는 동 주앙의 화려한 외모와 언변이 큰 몫을 하지만 그가 귀족이라는 사실도 크게 일조한다. 귀족이라는 지위는 그에게 금전적인 여유를 주고, 자신이 마음 먹은 바를 실행하는데 생기는 장애물들을 제거해주기도 한다. 거기에 하인 스가나렐은 그의 행동에 대해 ‘하늘이 노할 일’이라며 불만을 표시했다가도 바로 꼬리를 내리고 아첨을 해야 한다. 동 주앙이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여인을 유혹하는 말을 직접적으로 하지는 않지만 여느 여인은 청혼신청을 받았음에도 동 주앙과 결혼하고 싶어 하기도 한다. 단순히 생가각하면 그저 주인공의 집안배경으로 생각하면 되지만 하인이 주인의 행동을 비판하려다가도 그쳐야하는 모습을 보자면 현 사회를 풍자하고 있는 듯 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마치 위계질서 때문에 그릇된 행동을 보고만 있어야 하는 그런 상황들을 비꼬는 듯하다.
이 연극에서 이러한 장치는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동 주앙이 천하의 바람둥이이고 그 어느 것에도 구속되지 않는 영혼이지만, 그에게도 꺼려지는 존재가 있기 마련이다. 그 존재는 바로 ‘동 루이’, 동 주앙의 아버지이다. 자신의 저택에서 갑작스런 아버지의 등장에 매우 당황해하며 자리를 피하고자 했다가 끝내 마주치게 되자 이어지는 ‘동 루이’의 훈계와 긴 연설. 하지만 그는 듣는 시늉만 하고, 그 다음엔 하나님을 믿겠다는 거짓 선언을 하는 등 아버지조차도 가볍게 속여 넘긴다. 깊은 생각이겠지만, 나는 이러한 동 주앙의 행동을 보며 요즘 젊은 사람들이 윗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를 제대로 취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씁쓸하기도 했다. 또 그가 한참 시골 여인을 유혹하는 장면은 관객석에서 끊임없이 웃음을 유도하는데, 이 웃음 뒤에는 살짝 암시가 담겨있기도 하다. 이 연극을 처음 보는 관객은 결말을 모르기 때문에 동 주앙이 죽음을 맞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쉽지 않지만 이 장면에서 동 주앙은 바로 전 날에 유혹한 여인의 친구가 지금 유혹하는 여인일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 두 여인이 맞닥뜨리게 되는 데에서 난항을 겪게 된다. 물론 언변술의 극을 자랑하는 동 주앙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사건을 무마시키지만 이러한 위험이 매 장면마다 등장하면서 그가 결국에는 큰 벌을 받게 될 것이란 암시의 장치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풍자와 재미를 넘나드는 연극 ‘동 주앙’의 또 다른 매력은 바로 무대 장치에 있다. 연극의 특성상 큰 무대가 있지는 않았지만 간결하고, 한 눈에 쏙 들어오는 무대 위에 계단형식의 작은 언덕 두 개가 있었다. 왼 쪽의 언덕에는 여인 형상의 석조모형이 있었는데, 동 주앙은 그 모형의 다리를 쭉 쓰다듬으면서 자신이 얼마나 여인을 갈구하는 지를 관객에게 보여준다. 관객 어느 누구도 그 모형을 그렇게 이용할 것이란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장면은 관객들의 반응을 이끌어내는 데 큰 일조를 했다. 또 맨 뒤에서는 곧 등장할 인물들이 슬그머니 나와서 그들끼리 대화를 한다거나 무언가를 표현한다던가 하는 모습이 보이는데, 훤히 뚫려 있다 보니 대사를 하고 있는 인물 뒤에서 때리는 시늉을 한다던가하는 행동이 다 보여서 소란스럽지만 아주 유쾌한 분위기를 이끌어 내는 역할을 하는 공간이다. 그리고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배우들이 퇴장하는 양 쪽 공간인데, 이 연극에선 배우들을 결코 그대로 내보내지 않는다. 대부분이 화를 내거나 실랑이를 벌이면서 나가는데, 배우가 혼자 나가면 사라진 쪽으로 빨갛거나 파란 조명을 비춰서 계속 집중하게 한 다음, 나가는 배우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거나 분노하는 시늉을 하면 무엇이 나올까 기대하던 관객들은 폭소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관객 입장에선 반복되는 웃음 요소는 쉽게 질려버리기 때문에 너무 매번 그러지 않았으면 좀 더 깔끔했을 거란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인물들이 많다 보니 입장과 퇴장하는 횟수가 많을 수밖에 없는데, 매번 같은 방법을 이용해서 그런지 충분히 어디에서 관객들을 웃게 하려는 지 예상할 수 있었다는 점이 조금 아쉬웠다.
다 말할 수는 없지만, 내용 구성면에서 살짝 아쉬운 부분은 몇몇 인물들의 대사가 조금 지루했다는 부분이다. 다른 마을로 도망가는 동 주앙을 잡기 위해 쫓아온 부인이 본심을 말해달라며 대사를 하는데, 수녀원에서 지내던 여인으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과장된 연기를 보여주기까지의 시간이 필요하다고는 생각했지만, 대사가 너무 길어서 언제 망가지는 캐릭터를 보여줄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결국 동 주앙이 죽게 되는 결말 부근에서, 등장했던 인물들이 모두 비석을 끌고 나와 동 주앙의 죽음을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내 입장에서는 좀 따분한 감이 있었다. 이쯤이면 동 주앙이 결국 죽게 된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에 그가 죽음 앞에서도 자신은 옳다고 하며 점점 땅으로 사라지는 장면을 보여주기까지 그리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았어도 될 것 같았다. 내가 연출을 했다면, 다른 인물들이 벌을 받을 것이라며 내뱉는 대사를 좀 줄이고 주인공이 죽은 뒤 다른 인물들이 살아가는 장면을 보여줬을 것 같다.
연출 면에서 조금 더 써보자면,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았던 부분인 ‘도망’ 장면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 동 주앙과 스가나렐이 평소의 옷이 아닌 다른 옷을 입고 도망가다가 숲에서 길을 잃게 되는데, 그 곳에서 부인의 오빠를 만나게 된다. 그들은 처음에 동 주앙을 알아보지 못하고, 괴한들에게서 구해준 동 주앙에게 감사의 표시를 전하며 자신들이 여동생을 버린 원수 ‘동 주앙’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곳까지 왔다고 설명한다. 처음에는 굉장히 당황하는 듯 하지만, 이내 언변의 달인답게 그럴싸한 말로 위기를 모면했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결국 자신이 동 주앙이라 밝히자 그는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에게 복수를 해야 한다 말아야 한다의 기로에 서서 괴로워하는데, 그 배우의 연기가 너무 기억에 남는다. 특히 고뇌를 하면서 동 주앙에게 무기를 겨눴다가도 도로 내려놓고 중얼중얼하는데, 인물이 원래 진지하고 굉장한 기사 느낌인지라 혼자서 두 상황을 오가며 독백을 하는 게 너무 재미있었다. 그 와중에 동 주앙은 뒤로 가서 그의 하수인들과 왜 저러냐는 모션을 취하는 동작들이 제대로 맞아 떨어져서, 가장 흥겨웠던 장면으로 기억한다. 그 다음으로는, 어제 유혹한 여인과 방금 유혹한 여인 사이에서 난감해하는 장면이다. 하필 두 여인이 절친한 사이였는데 그걸 예상하지 못했던 그는 두 여인 모두에게 청혼의 말을 한 것이 들통날까봐 말을 계속 돌려가며 그 곳을 빠져나가려 한다. “저 여자는 자기가 청혼을 받았다고 할 겁니다.”라고 두 여인에게 말을 해놓고, 서로 그렇게 말을 하자 “봐요, 내 말이 맞죠?”라는 식의 대사를 계속 하고, 무대 위가 정신없이 돌아가서 넋을 놓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이 연극은 다분히 ‘재미’를 추구하는 연극이지만, 그렇다고 내용이 없는 극은 아니다. 분명 종교적인 요소도 강하게 들어있고, ‘권선징악’의 내용도 담고 있어 연극이 끝난 후에 많은 감상을 하게 한다. 동 주앙이 일 년 내내 여인 유혹하는 생활만 하고, 빚을 진 사람에게 돈 갚기가 싫어서 칭찬 일색으로 혼을 쏙 빼내어 자신은 유유히 자리를 뜨고, 가난한 이에게 돈을 얻으려면 하늘을 욕해보라는 등의 악행을 종종 하기 때문에 ‘죄’가 쌓이고 쌓여 ‘하늘’의 벌을 받아 죽는 결말이라 인물들이 계속 ‘하나님’이라는 대사를 하기 때문에 타종교인인 사람들에게는 불편했을 수도 있다. 시대배경으로 설정되어있기 때문에 관객들도 충분히 이해하고 봤어야 하지만, 예술작품이니 만큼 모두에게 좀 더 친숙하게 다가가려면 그런 요소들을 조금은 줄였어도 괜찮았을 것 같다. 그리고 ‘벌’을 받아 죽는 장면을 조금 더 쉽게 설명이 되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어린이들이 보기에는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 같은 부분이 왜 저렇게 갑자기 비석이 나오고, 동 주앙은 왜 바닥으로 사라지는지 쉽게 파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나도 동 주앙이 아래로 사라지는 부분에서 죽었다는 것을 표현하는 건지 그냥 재미요소로 작용하는 건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아무래도 오페라로 더 유명한 작품을 연극으로 전환하는 부분에서 재미는 극대화하고 무대는 작아져서 탈락된 요소들이 많아 힘든 부분이 다소 존재했을 것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몇 가지만 개선된다면 더 쉽고 재미있는 연극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