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어왕 [프리뷰]> 리어 왕 프리뷰 - 머릿속 텍스트가 무대 위에서 살아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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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육*리
등록일 2015.04.16
조회 3264
작년이 셰익스피어 탄생 450주년, 내년이 타계 400주년이라 전세계적으로 셰익스피어 극이 많이 상연된다고 합니다.
평소에 워낙에 셰익스피어 작품을 좋아하던 터라 이번 명동예술극장에서 만나보게 된 <리어 왕>이 굉장히 반가웠습니다.
텍스트로만 만나 보던 리어 왕을 무대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라 기대가 많이 되었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대했던 만큼 정말 좋았던 공연이었습니다. 역시 희곡은 무대 위에서 직접 상연될 때 비로소 생명을 얻고 살아난다는 사실을 다시금 실감하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리어 왕>은, 워낙에 유명하기도 하지만 정말 마음 시리게 슬프고 안타까웠습니다.
특히 연출상 일부러 의도하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를 매몰차게 내치고 구박하는 거너릴과 리건의 모습에서 마치 요즘 세대의 부모자식 갈등을 보는 것만 같아 굉장히 안타까웠습니다. 물론 리어 왕과 자식들의 관계는 권력이 없는 왕(그러나 명예는 남아 있기를 바라는)과, 그 늙은 왕에게 권력을 이어받고는 이제 제거해야 할 정적처럼 취급하는 두 딸의 관계이므로 보다 복잡한 관계이지만, 부모는 자식이 봉양하기를 기대하지만 자식은 자신의 삶을 더 중요시 여겨서 갈등이 빚어지는 현대의 상황과 오버랩되었습니다. 말싸움이 최고조에 이를 때 리어에게서 등을 돌리고 선 거너릴과 리건의 구도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갈등이 있었다고 해도 80이 넘은 아버지를 폭풍우 치는 겨울밤에 내쫓은(코델리어의 대사처럼, '집 없는 개라도 난롯가에서 쉬게 해야 할 날씨'에...) 두 딸은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무대가 왜 기울어져 있나 했는데 비가 오는 장면이 정말 압권이었습니다. 간간이 미끄러지던 등장인물(켄트나 에드거)들도 일부러 넘어지신 건지 실수로 미끄러지신 건지는 몰라도 정말 자연스러워 극중 등장인물들의 비참한 상황이 더욱 돋보였습니다. (하지만 나무 소품이 올라간 다음 계속 떨어지는 빗방울은 미리 나무 아래쪽도 닦아 둔다든가 하는 식으로 조치를 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쉬웠던 장면들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마지막 장면에서 리건이 죽을 때 상황이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원전에서는 리건이 몸이 좋지 않다며 퇴장한 다음 전령이 다시 들어와 죽었다는 사실을 알리는데, 무대 위에 계속 남아 있는 것은 좋았습니다만 죽음의 이유가 잘 드러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또, 거너릴이 리건의 죽음을 보며 웃는 장면과 에드먼드가 칼에 찔리는 것을 보며 비명 지르는 타이밍이 너무 가까워(거의 바로 이어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관객 입장에서 조금 혼란스러웠습니다. 시선이 관객(정면)을 향해 있어서 거너릴의 반응이 어떤 행동에 대한 것인지 바로 알기가 힘들었습니다. 극의 클라이막스 부분인 만큼 연출상 단서를 좀더 명확하게 해 주실 수 있으면 합니다. 거의 마지막 부분쯤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 전쟁이 일어날 때 에드먼드가 서 있는 상태에서 무대가 올라가는 장면 또한 관객 입장에서는 뭔가 액션스러운 연출을 기대하게 되지만 무대가 좌우로 흔들리는 것에 그쳐 상황이나 연출 의도 파악이 조금 힘들었습니다.
또, 다소 조심스러운 부분이긴 하지만 1막 5장에서 광대가 퇴장하며 관객에게 던지는 농담은... 원전에 등장하는 것이긴 하지만 현대 관객 입장에서 보자면 다소 부적절하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셰익스피어 작품에는 현대 시점에서 봤을 때 여성에 대해 조금 문제의 소지가 될 수 있을 대사들이 종종 등장하기는 합니다만 이 농담의 경우 관객을 지목하여 던지는 것이기 때문에 지목된 입장에서는 상당히 당황스러울 것 같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프리뷰 말고 정식 상연으로도 또 보고 싶은 공연입니다. 배우 분들의 뛰어난 연기가 내내 기억에 남아 생각이 납니다. 슬픔과 후회, 분노에 미쳐가는 리어뿐만 아니라 야심가 에드먼드, 표독스러운 리건, 콧대 높은 거너릴,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때로 진중한 일침을 날리는 광대(모두가 죽은 자리를 한번 돌아보고 말없이 사라지는 마지막 장면이 정말 좋았습니다), 에드먼드의 계략에 속아넘어가는 글로스터, 신들린 듯한 미친 척을 보여 주던 에드거(거적때기가 벗겨지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하게 됩니다... 안에 잘 챙겨 입으신 것 맞지요? ㅜㅜ) 억울한 표정의 오스왈드, 착하지만 힘이 없는 코델리어(프랑스 왕은 어디에...?) 강력한 욕설을 날리는 켄트, 잔인하고 냉혈한 콘월......
책으로만 읽었던 작품을 이리도 멋진 무대로 만나 볼 수 있었다는 게 참 기분 좋았던 하루였습니다. 어제 공연이 끝나고 나서 집에 오는 내내, 그리고 오늘 아침 책을 다시 들춰 보고 또 읽으며 무대를 다시 생각하고 곱씹으며 지내고 있습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울부짖던 리어의 모습이 생각나 마음이 아파집니다. 텍스트로 남아 있던 제 마음 속 <리어 왕>에 멋지게 생명을 불어넣어 주신 명배우님들과 윤광진 연출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