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리동물원(2015)> 유리동물원
-
작성자 (*퇴회원)
등록일 2015.03.16
조회 2994
바쁜 와중에도 보고 싶었던 연극을 하나 보았다.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리동물원>. 테네시 윌리엄스는 잘 몰랐지만 그가 쓴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연극 문외한인 나도 들어보았을 정도의 작품.
일단, 어렵지 않아서 좋았다. 작년에 명동예술극장에서 보았던 <반신>은 그야말로 상징주의의 향연이라 재미있었던 것과는 별개로 머리가 복잡했는데, 유리동물원은 비교적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대공황시대 미국의 세인트루이스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등장인물들의 성격이나 갈등 구도에 공감이 잘 됐다. 아마 대공황 때랑 지금 한국의 상황이 비슷해서인지도. 경제는 어려워서 젊은이들은 희망을 점점 잃어가고, 기성세대는 과거의 영광에 젖어있고...특히 어머니와 누나를 부양하기 위해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억누른 채 "죽은 사람이 차라리 부러울 정도로" 가기 싫은 물류창고에서 일하는 톰 윙필드의 대사는,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내가 하고 있던 고민들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았다. 하지만 뜻밖에도 내가 가장 감정이입이 많이 됐던 인물은 톰이 아니라 로라였다.
열등감...내가 남들보다 못하며, 다른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나를 싫어하거나 혐오할 것이라는 느낌. 다른 사람 앞에 나서는 것이 두렵고, 길을 걸으면 전부 자기만 쳐다보는 것 같고, 남이 무슨 이야길 해도 결국 자기 흉을 들춰내는 것 같고. 그래서 결국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는 것. 유리동물원은 바로 이런 로라의 닫힌 세계를 의미하는 것 같다. 안식처이자 동시에 감옥인.
열등감이 항상 데려오는 친구가 무력감이다. 마음의 고통이 너무나 커져서 그게 육체의 마비로 이어진다. 나는 괴로워 죽겠는데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다. 그래서 나를 괴롭히는 것을 저지하기는커녕 그것으로부터 도망칠 수도 없다. 그러한 자신의 모습이 너무 한심하여 열등감이 커지고, 그것이 무력감의 증폭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무한반복... 짐이 찾아와서 아만다, 톰과 함께 저녁식사를 할 동안, 소파에 누워 흐느낄 때의 로라의 모습에서 이 열등감과 무력감이 너무 처절하게 느껴져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래서, 화자는 톰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대사의 양은 아만다가 갑임에도 불구하고, 이 극의 제목은 《유리동물원》인 게 아닌가 싶다.
그 밖의 생각들:
1. 친구랑 얘기하면서 느낀 건데 아만다의 말투가 원작과 조금 달라진 것 같다. 아만다는 나름 상류집안 여식이었던 것 같고, 실제로 영어 자막에서도 고급스런 귀족 영어로 말하는 듯 한데 반해, 아만다의 대사는 비교적 평범한 한국 아줌마 같다는 느낌이었다. 하긴 구한말에 신분제가 없어진 뒤, 한국어에는 특별히 상류계층이 쓰는 어투가 존재하지 않으니, 그런 부분에서는 원작의 느낌을 살리기 힘들었을 것 같다. 그래도 억지로 갖다 붙인다면 사극에서 왕족이나 양반들이 쓰는 말투로 바꿔보는 걸 생각해 볼 순 있을 것 같은데, 다시 생각해보니 20세기 초 미국이 배경인 연극에서 우리 사극 말투를 쓴다면 상당히 우스웠을 듯하다. ("짐 도령, 이렇게 누추한 집에 왕림하여 주시니 우리 윙필드 모녀는 기쁘기 한량없소." 이럴 순 없으니까.)
2. 테네시 윌리엄스 : 간혹 사람 이름이 미국 주 이름인 특이한 경우를 볼 수 있다. "다코타" 패닝. "인디애나" 존스, 그리고 "테네시" 윌리엄스. 또 없을까?
3. 인터미션 시작 전에 톰이 무대 옆 벽에 "분필로 15분 휴식" 이라고 정색한 표정으로 적고 딱 나가던 게 매우 신선했다. 관객들도 재미있었는지 크게 웃으며 박수를 쳤던 기억이 난다. 이 부분이 원작에도 있는지 궁금했는데, 알아보니 이번에 명동예술극장에서 만들어 넣은 퍼포먼스라고 한다. 굿잡 ^-^b
4. 이 희곡은 작가 자신의 경험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결국 좋은 작품은 경험에서 우러나올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인생에는 극적인 부분과 무미건조한 부분이 실타래처럼 엉켜있는데, 그 중 극적인 부분만 뽑아낸 게 문학이 아닌가 싶다.
마지막으로, 좋은 공연 만들어서 무대에 올려주신 명동예술극장에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자주 찾아뵐게요.